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안에서 꽃 내음을 느끼기엔 아직 코끝이 시리지만 연둣빛 정수리로 단단한 흙을 밀어내며 고개를 내미는 기운에 봄이 가까이 왔음이 느껴진다. 시작과 끝이 애매한 계절의 변화에 우리 조상들이 현명하게 답을 딱 정해주었는데 그것이 24절기다. 시간이란 물처럼 자연스레 흐르는 것이다. 인간들이 편의를 위해 24시간으로 정하고 365일이라는 날수로 1년이라는 기간을 만들었다. 일 년 안에는 4계절이 있는데 농경생활을 하는 조상들은 24절기를 나눠 그때마다 하늘에 기도드리고 땅에 빌었다.
입춘은 봄의 4절기 중 첫째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다. 보통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한다는데 올 입춘은 딱 그 대략의 날인 2월 4일이다. 운명적인 뭔가가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하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캘리그래피를 하는 내게 며칠 전 지인이 임무를 하나 던져주었다. 봄 인사 한 줄을 부탁한 것이다. 새날에 대한 기대감을 문자로 그려 달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장들을 찾아보다 그래도 입춘축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춘 날 입춘 시에 입춘 축을 붙이면 그 어떤 굿보다 낫다며 아빠는 매년 공들여 준비한 입춘 축을 가슴에 안고 기도를 드리셨다. 지인의 부탁도 있었지만 이 봄엔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봄은 더 특별할 테니까 말이다.
호랑이가 굴렁쇠는 굴리며 달려가던 88올림픽 개막식을 기억하나요? 내 또래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이 장면을 모르는 이가 없을 듯.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이 몇 뼘은 성장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의 성장이 88올림픽 전과 후로 나뉜다면 코로나는 또 다른 전 세계적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 2월 말의 상해 봉쇄. 상하이에 생활의 터전을 잡고 있던 우리에겐 또 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 역시 그러한 것이 상해 봉쇄 이전과 이후 세상을 바라보고 시선과 생각들이 변했다.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후하고 뱉어 본다. 영원을 살수 없듯이 나는 지금 여기라는 찰나를 살고 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말이다. 한 알의 쌀로 밥을 지어낼 수는 없듯이 별 의미 없이 여겨질 지도 모르는 순간들이 쌓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계절로 이어지면 결국 내 삶이 된다. 지난 2022년의 봄을 모두 태워 내가 배운 것들이다. 내가 기쁘다 여기면 그렇게 될 것이고 아프다 생각하면 고통은 깊어져 갈지 모른다. 오늘의 감정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입춘대길(春大吉, 입춘이 됐으니 크게 길한 일이 집안에 가득 하라), 건양다경(建陽多慶, 양의 기운이 태동하는 때이니 많은 경사가 집안에 가득 하라) 등 글귀를 입춘축으로 많이들 쓴다. 봄이 되고 양의 기운이 가득한 것은 자연의 이치요 누구나 피하려 해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길한 일과 많은 경사랑 그 기준이 개인마다 다르고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질 것도 아님이 현실이다. 맘을 다해 기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결실을 맺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봄의 어원은 보다(見)이다. 우리 앞에서 반짝일 새로운 순간들을 보고 새 생명들의 숨결을 느끼는 계절이다. 그렇게 입춘을 맞이 하련다. 봄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려 나가 보련다. 겨우내 꼭 닫아 두었던 문을 활짝 열고 나가 누구보다 격렬한 기쁨으로 새로운 날들을 시작해 보자. 지난해 봄 내내 갈고 닦았던 칼을 꺼내 무라도 썰어야 길한 일들이 내 집에 가득하지 않을까? 복은 굴러오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니까!
화몽(snowys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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