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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 문학동네 | 2021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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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은 증조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현재의 자신에 이르는 시점까지 4대에 걸친 여자들의 낮고 낮은 삶, 그리고 주인공인 지연의 시점에서의 두 이야기가 시간을 오가며 사진과 기억으로만 남은 오래전 사람들을 형상화하면서 진행된다. 한없이 따뜻할 수도, 또 한없이 잔인할 수도 있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갯장구는 바닷가 돌 틈이나 방파제에 살면서 해변을 청소해. 갯장구야,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이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엄마는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매 순간 경계해야 했고, 드물게 밝게 환기되는 순간에도 뒤통수를 치는 불행이 올까 하며 그 순간의 기쁨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살았던 삶이 책에서 내내 그려진다. 병들어 누워있는 어머니의 곁을, 식민지 시대에 결혼 안 한 여자들은 마구잡이로 잡혀가는 순간, 살기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도 평생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슬픔부터, 남편한테 버려지고 이혼당한 여자에게 “네가 남편이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게 했겠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 억울함까지 먹먹하게 담겨있다.
지연의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지연은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런 엄마의 시선에서 보면 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그녀에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는 삶도 유지하라는 엄마는, “날 때리는데 맞고 있어야 하냐”고 묻는 딸에게,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된다고 딸에게 말한다. 심지어 사위가 바람을 피웠는데도 딸보고 참고 살기를 강요한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전쟁이나 식민지 같은 큰 아픔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물주머니 같은 상황이 느껴진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은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여성 서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의 엄마, 엄마의 엄마는 전쟁 시대, 식민지 시대를 겪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와 같은 방을 썼던 나의 할머니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못 한 채 나이가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삶이 어땠을까, 부디 너무 마음이 아프지 않았길 뒤늦게 바라본다. 여자 홀로 딸을 데리고 피난길을 나서면서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딸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우리네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왜 ‘밝은 밤’일까?
“어둠 속에서도 밝을 수 있잖아요. 인생이 빛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밝다는 것도 알 수 없으니까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보이듯이요.” – 최은영 작가의 출판 인터뷰에서
나은수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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