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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 | 문학동네 | 2021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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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자라나는 새싹들이 주 독자층이어서 내용은 교훈적이며 밝아야 하기에 우유보다 술이 좋을 나이인 나에겐 싱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긴긴밤’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고 마침 도서관에 있어서 ‘긴긴밤’을 읽게 되었다.
첫 인상과도 같은 표지에 있는 ‘잘 익은 망고 열매 색’의 하늘 색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읽어보니 분명 희망과 용기를 주는 동화책이 맞는데, 노년의 삶을 보내는 노든이 훅 치고 들어오는 첫 맛으로 시작해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묵직한 바디감을 느꼈고 책을 덮은 후의 달콤쌉싸름한 끝 맛까지 다채로웠다.
아기 코뿔소 노든의 첫 기억은 유년 시절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서부터 시작한다. 청년이 된 그는 코끼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코뿔소가 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보육원을 나가는 선택을 하고 광활한 초원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딸을 얻으며 ‘코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행복은 길지 않았다. 위기를 맞닥뜨리고 <파라다이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처음으로 ‘노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의 우리에는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 코뿔소’라는 푯말이 꽂혀 있었다. 아내와 딸을 잃고 분노와 증오만이 남은 노든에게 동물원에서 만나 우정을 나눈 ‘앙가부’는 위로였고 치유였다. 그러나 유일한 친구 앙가부가 죽임을 당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알의 형태로 노든에게 온 ‘나’라는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노든과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바다를 향해 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P81)
바다에 도착하고 이들은 각자의 길을 떠난다.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시선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 이야기의 매력일 텐데 나는 ‘디아스포라’ 적 관점으로 이 책을 보았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은 적었던 편이지만, 요즘은 자의로 이주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고 전쟁과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떠나기도 한다. 현재 전 세계 난민의 수는 7천만이 넘는다고 한다. ‘파친코’나 ‘미나리’ 같은 디아스포라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이유도 디아스포라가 현재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노든이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서 경험했을 상실감, 분노, 억울함, 허망함, 무력감을 느껴본다. 처절한 긴긴밤을 버텨냈을 노든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도 굴복하지도 않았고 품위 있고 당당하게 삶을 마주했다.
멀리서 보면 사막은 황량해 보이고, 그 위를 걷는 나와 노든은 가망이 없는 두 개의 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모래알 사이를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개미들과 듬성듬성 자라난 풀들, 빗물 고인 웅덩이 위에 걸터앉은 작은 벌레들 소리, 조용히 스치는 바람과 우리의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은 모래 속에 숨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기적은 우리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P107)
감사와 긍정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냈다는 내용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감탄이 터져 나왔다.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 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P99)
노든의 말에 공감한다. 내게 의미 있는 존재들과 친밀감을 쌓아가는 방법을 노든에게서 한 수 배운다. 책 속의 곳곳에 배치된 그림들도 좋다. 루리 작가의 일러스트 전시회가 있다면 가보고 싶다.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듯, 자신의 삶을 잘 숙성시킨 노든의 인생 이야기 <긴밤>의 소개를 마친다.
최수미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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