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레몬티를 주문했다. 얼음이 가득 담긴 레몬티를 받아 들고 난감해하는 나를 보고, 매장 직원이 ‘얼음을 빼줄까’라고 물었다. 여름에는 따뜻한 걸로 달라고 꼭 집어 말하지 않으면 찬 음료를 준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직원이 커다란 숟가락으로 컵에 담긴 얼음을 건져냈다. 컵이 반 이상 비는 걸 보자, 그는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고 덕분에 미지근하고 싱거운 레몬티를 마시게 되었다. 밍밍한 레몬티는 찬 음료보다 못했지만, 누군가의 배려의 결과니 불평할 수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데도 결국 사랑하는 이에게 미지근한 레몬티만 건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공항으로 향하곤 했다. 큰아이 유치원 졸업식이 있던 날도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연년생 두 꼬마를 남편에게 맡기고 코르시카에 가기 위해서였다. 비행기 가운데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안의 불이 꺼지고 천장에 수많은 별이 촘촘히 박혔다. 가짜별이라는 걸 알면서도 설렜다. 시계를 보니 막 큰아이의 졸업식이 시작했을 시간. 무대에 오르기 전, 아이의 가슴도 콩닥콩닥 뛰고 있겠지. 눈물을 글썽였다. 삶도 사랑도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걸 벗어났을 때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비행기 천장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여주고 싶어도 남편과 아이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졸업식장에 있었다면 그저 또 하나의 이벤트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는 데 바빠, 사랑은 뒷전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안톤 체호프 <공포> 중)
더 이상 묻지 않고 궁금하지 않다면 우리는 사랑의 가장 큰 적인 진부함에 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면,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내 사랑이 진부하다고 느껴질 때면 이장욱의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의 하루오처럼 내 존재를 ‘오 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 보려고 애썼다. 진부함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기에 다른 세계로 옮겨 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삶과 상대를 바라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물론 여행도 반복되면 진부해진다. 수없이 비행기를 타고 이국땅을 여행하고 나면, 낯선 나라의 숙소에 누워도 심드렁할 수 있다. 결국 몸의 이동보다 중요한 건 시선의 변화다. 낯설게 볼 수 있는 시선. 특이할 것 없는 일상에서도 시인은 아름다운 시어를 낚는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음료를 좋아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카페 직원은 내게 찬 걸 원하는지 뜨거운 걸 원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하는 카페 직원의 고단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나는 직원이 다시 물을 필요 없도록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주문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