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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엠마뉴엘 우다 그림의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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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림책과 함께하는 마음 챙김 글쓰기” 특강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엄마’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보았다.
“‘엄마’하면 우선 바쁜 손놀림이 떠올라요. 집에 쉴 새 없이 찾아오던 손님들 밥해 먹이던 빠른 손.”
“엄마는 척척박사세요. 저 어릴때 손수 옷도 다 만들어 입히셨고, 대학때까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라 본 적 없어요. (아빠는 평생 이발소 못가보심).”
“어릴 적 여름 한낮에 엄마가 구르는 재봉틀 발판 소리를 들으면서 낮잠을 자곤 했던 평안하고 한가롭던 풍경이 떠올라요.”
“엄마의 코바늘뜨개요. 아빠가 담근 술이며, 냉장고 위며 코바늘 뜨개로 덮개를 떠서 알록달록했던 고향집이 생각납니다.”
이쯤 되면 엄마는 식구는 물론 손님까지 밥도 잘해 먹이고, 옷도 잘 만들고, 머리도 잘 자르고, 뜨개질도 잘하는 만능 슈퍼우먼이다. 한편으론 세대가 바뀌고 젊어지면서 전통적인 어머니상 대신, 세련된 화장과 핏된 옷을 입고 또각또각 힐을 신은 모습, 카레이서 못지않은 운전스킬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운동과 쇼핑을 즐기는 희대의 맥시멀리스트, 60의 나이에도 헬기조종을 하는 재난구조전문요원으로 활약하며 스노보드를 즐기는 키 172의 어머니도 계신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엄마는 음식으로 기억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열살 무렵인가,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가는데 부엌에서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 쪼그려 앉아 찹쌀로 밥을 지어 공이로 찧고 콩가루를 묻혀서 손수 인절미를 빚고 계셨다. 다음날이 내 생일이었다. 떡을 뭐 그리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어린 아이 생일쯤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던 때도 아니어서 그땐 심상하게 넘겼던 것 같다. 두 해 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셔서 떡은 고사하고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지만, 살아오면서 힘들 때마다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쭈그리고 앉아서 딸의 생일 떡을 빚어주던 엄마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기운을 낸다. 그래, 나는 소중한 아이지. 그러니 막 살면 안 되겠다. 열심히 살아야지. 그런 생각들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줬던 것 같다.
미셸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에서도 한국인 엄마와의 유대감과 문화적 정체성은 음식을 통해 이어진다.
˝고추장 그렇게 많이 넣지 마. 너무 짜.˝
˝숙주는 왜 안 먹어?˝
그 끝없는 잔소리가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발 편하게 좀 먹자고 곧잘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대개는 그 잔소리가 한국 엄마들이 하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겼다. 그걸 되찾을 수만 있다면 당장 무슨 일이라도 다 하련만…….
그녀도 엄마를 암으로 잃고 나서 엄마가 해주던 된장찌개와 잣죽을 끓이고 김치를 담그면서 상실에 따른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나중에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음식으로 기억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뜬금없이 가족 단톡방에 엄마가 해준 음식 중에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부추부침개”라는 답이 돌아온다. 콩나물과 톳나물도 뒤따라 나온다.
내가 만든 부침개는 가족과 친구들 두루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그동안 내가 해준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콩나물이라니. 우리 애들 입맛 참 소박하다는 생각과 내가 고급 요리를 해준 게 없구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엄마표 음식이 있다는 게 어디냐 싶어 방학이라 수업이 몇 개 취소된 김에 냉큼 한국에 날아가 부추부침개와 콩나물과 톳나물을 넉넉히 해주고 돌아왔다.
어릴 때의 입맛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비단 입맛뿐이랴. 어린 시절,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부모님께 들은 말 한마디가 아이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의 기준이 된다. 아이에게 의미 있는 어떤 순간 ‘찰칵’하고 찍힌 부모의 모습은 나중에 아이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마시라. 그래도 만회할 시간은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