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우연히, 웨스 앤더슨2’ 전시]](http://www.shanghaibang.com/webdata/aacn02/news/202502/20250228174309_7509.jpg) |
[사진= ‘우연히, 웨스 앤더슨2’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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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 한국에 다녀왔다. 원래 갈 생각은 아니어서 항공권 예매도 안 한 상태였다. 연휴 기간에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하고 우연히 항공권을 검색하다가 한국행 싼 표가 나와 있길래 바로 질렀다. 단, 7kg 미만의 짐만 기내에 실을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서 배낭 하나씩만 짊어지고 훌쩍 나선 길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얼굴 보기도 힘든 아들이 엄마, 아빠 왔다고 소고기 스테이크도 사주고 전시회 예매도 해주어 같이 다녀왔다. 그렇게 우연히 관람하게 된 전시가 ‘우연히, 웨스 앤더슨2’이었다. 주의할 것은 이 전시가 특유의 파스텔 톤과 완벽한 대칭구도로 기억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독 웨스 앤더슨 본인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월리 코발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다가 우연히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속 장면과 닮은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웨스 앤더슨의 작품세계에 열광하는 팬들과 모험가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그의 채널에 보내기 시작했다. 곧 그의 채널 @AccidentallyWesAnderson은 19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트랜드가 되었다. 월리 코발은 자신의 채널에 쌓인 사진들을 모아 책도 출간했고 뉴욕, 런던, 도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전시에도 25만의 관람객이 다녀가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파란 버스나 빨간 지붕이 있는 집, 노란 등대, 하늘색 아이스크림 트럭, 초록색 대문같이 몹시 ‘웨스 앤더슨스러운’ 색감의 사진들이 여행 세포를 자극하며 설레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게다가 유독 젊은 커플들이 많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다 비행접시 픽토그램과 함께 “SELF PARKING”이라고 쓰인 표지판 앞에서 낄낄거리며 사진을 찍다가 문득 그 전시 공간이야 말로 인스타 감성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SNS를 통해 팬덤처럼 여행지 문화를 공유하는 거대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것이다. 소비와 생산, 예술과 비즈니스의 경계가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었다.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선 곳들을 보니, 심박수를 체크해서 자신에게 꼭 맞는 여행지를 제안하는 기계 앞이거나 엽서를 제작하는 부스였다. 뱃머리에서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남극의 바다를 구경하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는 포토존도 있었다. 이렇게 ‘느낌을 조직하는’ 것이 바로 전시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낯선 풍경’을 뒤로 하고 전시장을 나오며 언젠가 남극을 꼭 가보고 싶다고 아들과 의견 일치를 보았다. 우연히 찾은 이곳에서 남극이라는 이름이 나와 연결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교육심리학자 존 크럼볼츠(John D. Krumboltz)는 커리어의 80%는 우연한 사건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우연과 마주친다. 친구 따라 봉사활동 갔다가 나의 능력을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새로운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실 개인의 커리어를 아무리 완벽하게 설정한다고 해도 그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우연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우연을 기회로 활용하는 능력은 차이가 있다.
크럼볼츠가 말하는 ‘계획된 우연’이란 우연한 만남이나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우연이 나의 진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준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개인의 특성과 직무 특성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20세기 산업사회에서는 매우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었는지 몰라도, 너무나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서는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새로운 일의 발견과 적응의 가능성을 높인다. 예측하기도 어렵고 통제하기도 어려운 우연을 기회로 활용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1)호기심 2)불확실성에 대한 인내력 3)유연성 4)낙관성 5)모험 감수가 필요하다고 그는 설명한다.
남극이라는 지명이 내 머리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우연들이 있었다. 연휴에 집을 나설 생각을 안 했다면 나는 결코 남극이라는 새로운 여행 계획을 꿈도 꿔보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계획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느낌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나의 ‘계획된 우연’은 적절한 계기가 다가왔을 때 나를 남극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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