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중국 3]
중국 고전을 읽는다 아Q정전(阿Q正傳)
격동의 시기, 민중을 일깨운 중국 현대문학의 출발점
<아Q정전>은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의 작품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베이징의 신문천바오(新闻晨報)의 부록에 연재되었다가, 1923년에 제1단편집 <납함(呐喊)>에 수록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1910년대 중국 농촌의 ‘아Q’라는 날품팔이의 삶을 묘사하는 지극히 평범한 전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머리 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탈바꿈 시켜버리는 아Q의 정신구조를 철저히 파헤쳐 희화화(戱畵化)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자기가 바로 모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 구(舊)사회의 병근(病根)을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다. <아Q정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하나는 아Q의 성품, 즉 중국인의 성품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에 관한 설명이다.
서구열강을 무시한 청나라, 중국인들 간접 비판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는 당시 중국인들의 패배근성, 노예근성, 영웅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아Q를 통하여 루쉰은 당시 인민들을 ‘깨어나게’ 하고 싶었다. 아Q는 미장의 사당 안에 살고 있고, 날품팔이를 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아Q는 예전에는 자기 집안이 잘살았고, 견식 또한 높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미장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에 차지 않았다. 아Q는 자신을 놀리는 사람들과 종종 싸웠는데, 건달들에게 담장에 머리를 찍히곤 하였다. 아Q는 형식상으로는 패배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스스로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정신적인 승리 법이 있었다.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정신법, 즉, 자기 합리화는 그가 늘 맞고 머리가 다쳐도 의기양양해지고 우쭐해지는 비법이었다. 역시, 그 자기합리화가 깨질 때마다 새로운 자기합리화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비구니나 어린아이와 같은 ‘약자’들에게는 볼을 꼬집는다든지, 뺨을 때린다든지, 폭력을 휘두르며 괴롭힌다. 루쉰은 이렇게 서구열강들에게 군사적으로 상당히 열세에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세계 중심의 나라’라고 일컬으며 서구열강들을 무시한 청나라 중국인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자만한 채 저항할 줄 모르는 인물형인 아Q를 잘 그려낸 점에서 루쉰은 <아Q정전>을 출판한 직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중국 전통사회에 뿌리깊게 존재하는 차별, 영웅주의 표현
루쉰은 <아Q정전> 속에서 중국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을 표현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차별과 무시를 당했던 아Q자신은 그 내면에 또 다른 차별을 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정수암의 비구니는 미장 마을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아Q로부터 차별을 받는다. 이는 불교와 여자라는 소수자 차별의 대표적인 형태를 잘 보여준 것이며 동시에 중국 전통 사회가 형성한 연약한 자, 소수자 차별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뿌리깊게 남아 있었던가를 나타낸다. 아Q는 짜오나으리댁의 유일한 하녀인 우어멈을 희롱하다가 미장에서 살기가 어려워져서 떠나게 된다.
후에 돌아온 아Q는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현금을 잔뜩 지니고 있었고, 예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거인 나으리댁에서 일했다고 하자 미장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지고 그를 존경한다. 아Q가 지닌 성안에 대한 지식과 그의 달라진 점은 미장의 짜오나으리와 동급이 된다. 아Q는 당시 일어난 신해혁명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을 보고 스스로 혁명당임을 자처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현실과 분리된 정신 승리 법으로 삶을 견뎌냈던 아Q가 혁명이라는 실천적 행동을 통해 삶을 개선하려는 질적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혁명의 가치보다는 남들보다 우월하려는 야심에서 기인했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그의 가짜 혁명당 행세는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
신해혁명에 대한 중국내부의 불만 나타내
<아Q정전>은 신해혁명의 중국내부에서의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Q는 ‘혁명’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성의 몇몇 고위관료들이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군의 우두머리는 옛날 그대로이고, 사회가 돌아가는 것도 그대로이다’라고 하며 아Q는 혁명을 비판한다. 이는 신해혁명의 실패에 대한 동시대의 중국 주민들의 불평과 같다. 우두머리와 몇몇 관료들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중국 주민들이 살아가야 했던 어려운 삶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쉰은 <아Q정전> 속에 가짜 양놈과 조수재가 자유당이란 혁명당의 배지를 4푼으로 사는 장면, 아Q가 ‘빌어먹을 놈들을 혁명해줄 테다’등의 장면들을 포함시켜서 혁명은 고귀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냈다.
냉혹 뒤에 숨겨진 루쉰의 민족에 대한 진한 애정
<아Q정전>은 치엔싱추언(錢杏邨) 등의 심한 비판이 있었으나, 중국 현대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며,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짧은 중편의 소설로서 루쉰의 글의 힘은 사뭇 대단하다. 중국 민족을 상징하는 아Q, 아Q는 누구에게 맞거나 해도 언제나 의기양양하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루쉰은 중화사상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린다. 타성과 대국의식에 젖어 사는 중국민족을 날카롭게 비난한 것도 대단해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놀란 점은 군더더기표현이 한군데도 없어 보여서다. 참 냉혹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냉혹 속에 루쉰의 자기 민족에 대한 진한 애정과 끓어오르는 열정이 느껴진다.
오늘날 시각으로 본 루쉰의 <아Q정전>
최근 신세대 중국 학생들은 루쉰이 묘사한 아Q라는 중국인의 상은 옛날 이야기 일뿐, 오늘날과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이 소설이 1910년도의 중국을 본 따서 만든 소설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린 것은 현재보다 이전의 한 시기이다”, “다만 내가 본 것이 현대의 전신이 아니라 현대의 후신, 불과 20~30년 뒤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루쉰의 말을 따르면, 얼마든지 현대사회에서도 아Q의 후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Q를 부정하고 싶은 중국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고등부 학생기자 김현진(BISS Y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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