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호는 지우(只宇)다. 중국에서 오래 공부한 스승님의 친구분이 하나뿐인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현재를 의미하는 ‘지’와 우주를 뜻하는 ‘우’를 써서 만들어주셨다. 현재에 충실하면서 온 우주가 아닌 나만의 ‘소우주’를 개척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지런하게, 인간으로 열심히 유영하라는 뜻인 것 같다”고 말한다.
윤아르떼 개인전 ‘C’est La Vie(쎄라비)’의 주인공 김영미 화가를 만났다.
동물 빌려 그려낸 인간군상
그녀의 그림에는 당나귀, 토끼, 소 등 동물들이 등장한다. 일각에서는 동물 작가, 우화 작가라고 일컫는 이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 속 동물은 동물의 형상을 한 또 다른 인간이다. “내 그림에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등장하는데 인간과 동물은 별개가 아니라 ‘우리’다. 보다 직접적인 모습을 인간으로, 조금 비틀린 것은 동물로 표현한 것뿐 동물이나 인간이나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공동 운명체다. 즉 내가 동물이자 동물이 나인 셈” 나아가 “피안(彼岸)이 차안(此岸), 차안이 피안”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여기에 흔히 말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도 비틀었다. ‘동물의 입장에서 본 세상은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그림 속에는 우스꽝스러운 우리네 모습도 가감 없이 드러나있다.
크로키에 담긴 혼연일체
갤러리 한 켠에는 동물 그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작품들이 걸려있다. 붓이 아닌 손에 물감을 묻혀 인물을 크로키한 것이다. 작가는 동물 그림과의 차이를 묻는 말에 “인간 원형 그대로를 그린 것이다. 인간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 욕망, 흔들림 등 감정의 카테고리를 분석적으로 끌어내고 싶어 그렸다”고 답했다.
눈 앞에서 원화를 보고 있자니 그 역동적인 움직임과 감정이 힘있게 다가온다. 작가는 그 공을 모델에게 돌린다. “모델은 20여년 경력이 있는 연극배우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감정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표현해준다. 모델은 움직이고 나는 그 순간을 그리고. 공간과 모델, 내가 합일되면서 물성(物性)까지 따라주는 그 순간 누에 실 뽑듯 뿜어져 나오는 것들이 그림으로 분출될 때 엑시터시를 느낀다. 이는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다.”
2주에서 한달 가량 걸린다는 두 사람의 작업 여정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 속에서 예술가의 혼이 전해진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25년간 그림을 그려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작가는 “예술가의 삶이라는 ‘삶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말한다. 올해로 55세에 접어든 그녀는 노모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을 완숙이라고 봤을 때 내 인생은 반숙”이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때로는 이렇게 사는 게 지리멸렬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노모에 대한 연민과 애착은 그녀가 또 다시 붓을 잡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다 인생인 것을”. 그녀의 전시회 타이틀이 쎄라비(C’est La Vie, 이것이 인생)였던 이유가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림 때문에 죽고 싶다가도 그림 때문에 살고 싶어진다. 그림이 없었다면 살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녀는 “그림 그릴 때만큼은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매일 붓을 드는 화가
전시회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대부분이 2015년 작품이라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전시회 작품은 일부일 뿐, 올해 한 드로잉만 3~400점은 족히 넘고 페인팅도 3~40점에 달한다. 한 해의 절반을 막 넘기는 시점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방대한 양이다. 어떻게 이 많은 것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저는 그림만 그려요”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다. 성실히 해도 살아남지 못하는데 남들 하는 걸 다 하면서 잘 하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단다. 그러다 보니 오른쪽 어깨 인대가 파열돼 굵은 침을 맞아가며 후회하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365일 거의 매일 붓을 든다. 그렇게 김영미 작가는 오늘도 자신만의 소우주를 개척하며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린다. 호를 지어준 분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참으로 이름에 충실한 삶이다.
김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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