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라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삶을 산 남동순 열사와 조금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친일의 삶을 산 김활란의 이야기이다. 독립운동가 남동순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일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아예 다루지 않으며, 인터넷에서도 그녀가 유관순 열사의 친구라는 점만 다룰 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이와 반대많은 사람들은 김활란을 안다. 우리 국민을 깎아지르는 절벽으로 몬 친일파로서가 아니라 여성교육에 힘쓴 교육자로 말이다.
혼란 속의 또 다른 불빛, 독립운동가 남동순 (1903-2010)
“그 죽일 놈들이 내가 (동지)이름을 내도 때리고 안대도 때릴게 뻔하거든,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하고 이를 악 물었지.”
기미년 3.1운동 당시 지방민들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천안으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이끈 유관순 열사를 대신하여 한성에 남아 독립운동을 이끈 남동순 열사는 먼저 간 친구 유관순 열사를 그리며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신익희 선생이 이끌던 7인 열사대의 유일한 여자대원으로 남자의 몸으로도 하기 힘들다는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수행한 남동순 열사는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그리도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과 마주했다.
그러나 남동순 열사의 애국운동은 끝날 줄을 몰랐다. 비록 얼마 못 가 해산되었지만 권율 장군의 행주부대를 모티브로 여자 예비군을 창설하여 나라를 위해 힘쓰고, 전쟁 후 부모를 여의고 갈 곳 잃은 아이들 1000여명을 거두어 한미고아원을 세웠다. 이렇게 남동순 열사는 평생을 나라를 위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살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은 그 어떤 위대한 업적으로도 가려질 수 없다, 김활란 (1899-1970)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으로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직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수백만 국민의 부모님, 친구 그리고 반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자이다. 큰 부를 가졌지만 더 큰 부를 갖고자 했고 자신의 이익을 쫓기 급급하여 나라를 배반했다.
그녀의 공식적인 친일행위는 1937년 즈음부터 시작된다. 열심히 일해 일제에 은혜를 보답하자라는 근로보국을 내세운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는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상무이사를 지냈고, 고위층간부와 상류층이 나서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애국금차회의>의 관리자였다. 종교계의 몇몇 사람들은 김활란을 친일행위와 때어놓고 볼 때, 훌륭한 기독교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제강점기 당시 세계 기독교 청년회를 탈퇴하고, 내선일체를 위해 일본 여자 기독교 청년연합회에 가입한다. 수많은 친일행위 중에서도 가장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녀가 아녀자들의 자발적인 정신대 동원을 위해 황해도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뻔히 어떤 곳인지 알면서도 국민들을 기만하는 그녀의 친일행위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모순된 삶의 대가
평생을 나라를 위해 힘쓴 남동순여사의 업적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이를 증명하듯 남동순 열사는 노년을 서울 우이시장 골목에 위치한 50년된 국민주택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나라가 힘들 때 친일 행위를 하며 부족할 것 없이 살던 김활란은 나라가 독립하자 더욱 더 윤택한 삶을 살았고, 몇 년 후 수교훈장과 교육부문에서 대한민국장을 수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꼼꼼했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그녀를 대단한 교육자나 기독교인, 혹은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기억했다.
부의 대물림으로 친일파는 그 후손들까지도 질 높은 삶을 누리고, 학문적 교육의 부족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잘 살지 못하는 악순환. 이러한 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굉장히 흔한 일다 못해 어느새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고등부 학생기자 권순(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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