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10학년 아들이 지친 모습으로 학교에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잘 갔다 왔냐고 하고 얼굴이 안 좋아 보여 고등학생인데 최근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아 다른 엄마들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피곤한 거 같네, 밥 줄까.”
“안먹어요!”
그런데 갑자기 화풀이 하듯이 크게 말하고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다정하게 물어봐 준 것도 어딘데 이게 감히 나한테 큰소리를 지르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지금 따라 들어가 뭐라고 한들 소용없을뿐더러 더 기막힌 반응을 볼까 봐 꾹 참았다. 사실 순간 엄마의 권위가 떨어질까 잠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생각하고, 괘씸한 마음도 가라앉았을 때쯤 아들이 잠에서 깨어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런 날이 왔을 때 내가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하고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아들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엄마 죄송해요, 제가 요즘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안 좋고 그냥 짜증이 나요. 제가 아까 잘못했어요.”
“사춘기라 호르몬 영향인가 보다. 다음부턴 조심하자.”
나도 뭐라 못하고 그냥 이렇게 끝냈다.
나는 예전 오빠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해 봤다. 둘 관계의 결말이 최악이었다. 인과관계를 따지자면 오빠보다 엄마의 양육방식이 문제라고 늘 생각했었기 때문에 난 다른 방식으로 아들을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아들이 나에게 버럭 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 인내심을 가지고 그냥 지켜만 볼 때가 됐구나 싶었다. 기본적인 인사만 서로 하고 아침에 제때 일어나든 말든, 밥을 먹든 말든, 숙제를 하든 말든 방구석에 종일 처박혀 게임을 하던 말던 일체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용돈 필요하다고 공손하게 부탁할 때 그 동안 한 마디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씩 했다. 용돈 받아가는 입장에서 그 정도 잔소리는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걱정될 때마다 내 마음을 다스렸다.
11학년 말이 됐을 때 성적이 바닥을 쳤고 결국 학교에 불려갔다. 난 아니라는 거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교장 교감 담임 선생님 앞에서, 순진 무구한 눈으로 선생님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우리 아들은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고 숙제하고, 어떨 땐 새벽에도 일어나 숙제하고 공부하는 거 같은데 성적이 안 좋은 게 이해가 안가네요.”
선생님들도 내 의도를 아셨는지 웃으시면서 “방에서 꼭 컴퓨터를 보고 있다고 해서 공부만 했겠냐”며, 책상과 컴퓨터를 거실 가운데로 갖다 놓고 온 가족이 그냥 다 볼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선생님들의 조언을 무한 신뢰하기 때문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들은 시간을 들여 숙제를 해 가기 시작했다. 동영상이나 게임은 가족들이 오가며 보고 있는 한 하지 않는 거 같았다. 다시 성적은 정상 궤도로 올라갔고 무난히 대학도 갔다.
졸업식하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날 아들에게 속 마음을 전달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라고 딸들과 달리 내가 함부로 대한 게 마음에 걸리고 일반 엄마처럼 고3을 전혀 고3답게 대해주지 않고 무관심해서 혹시나 원망이 있을까 걱정 되어 엄마도 사람이고 잘 몰랐고 반성 많이 한다. 그런데 너를 사람으로 잘 키우려고 노력했고 많이 사랑한다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사실 다른 엄마들처럼 잔소리 않고 내 일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에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자기 친구들이 학교 와서 자기 엄마들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그렇지 않아서 너무 좋았어요.”
그때, 아들도 털어놓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에 딸이다. 9학년 딸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 호르몬이 작동하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딸은 아들과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제 또 인내심을 갖고 남은 3년, 수행의 길을 가야 한다. 최소한 좋은 관계는 유지하고 싶으니까. 중간에 정신줄 놓고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우리 딸도 이 과정을 잘 지나갈 거라고 믿는다.
튤립(lks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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