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명주,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아오른 고층 건물들……’상하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하지만 진짜 상하이 토박이들은 말한다. ‘농탕(弄堂)’이야 말로 상하이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농탕’은 상하이의 전통 주거 양식을 말한다. 골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베이징의 ‘후통(胡同)’과 비슷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와이탄 부근의 관광지를 걷다 보면 좁은 뒷골목에 현대식 건물들과는 거리감이 있는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농탕이다. 길을 따라 일자로 쭉 늘어서 있는 농탕 특유의 주거 양식은 폐쇄적인 베이징의 쓰허위엔(四合院)에 비해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고층 건물 밑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는 농탕은 오랜 기간 상하이에 거주한 시민들에게는 사연 넘치는 감성의 공간이다. 해방 전까지 상하이에 존재했던 3840곳의 농탕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 1500곳이 채 남지 않았다. 중국 근∙현대사가 녹아 있는, 그 혼란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문인들의 터전 상하이 농탕, 그 중에서도 ‘최고의 골목길’로 꼽히는 8곳을 소개한다. 아직은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부는 4월, 농탕을 거닐며 얼마 남지 않은 상하이의 봄을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가장 정갈한 골목길, 화이하이팡(淮海坊)
화이하이팡은 1924년에 인근 도로명을 따온 ‘샤페이팡(霞飞坊)’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뒤 1949년에 ‘화이하이팡’으로 재탄생했다 중국 현대 화가 쉬베이홍(徐悲鸿), 문학가 빠진(巴金), 후뎨(胡蝶), 쉬광핑(许广平), 샤오쥔(萧军) 등 유명인들이 바로 이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이하이팡의 건축 양식은 매우 독특하다. 서양의 건축 예술 분위기를 풍기는 행렬식 구조와 정돈된 이중 경사 지붕, 깨끗한 붉은 벽돌은 화이하이팡의 대표적 건축 특색이다. 이곳에 있는 199동의 3층짜리 벽돌과 목조를 혼합한 건물은 모두 통일된 양식을 하고 있어 더욱 정갈한 느낌을 준다. 지금은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 지붕 위 작은 굴뚝은 석양이 질 때 마치 태양이 굴뚝에 걸려있는 듯한 절경을 연출한다.
∙ 黄浦区淮海中路1857弄
가장 클래식한 골목길, 부가오리(步高里)
1930년 프랑스 상인들에 의해 지어진 부가오리는 상하이 전통 주택 양식 스쿠먼(石库门)의 대표로 불린다. 서양 연립 주택과 융합된 부가오리의 스쿠먼 건축은 중국 전통 주거 문화 풍속을 잘 보존하고 있다. 입구에 걸려있는 중국식 프랑스어 간판은 부가오리의 예사롭지 않음을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물고기 새빨간 비늘을 연상시키는 붉은 지붕과 마치 덩굴이 엉겨 있는 것 같은 지붕창은 부가오리만의 건축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견고한 입구 대문 뒤에 보이는 좁디좁은 마당, 길쭉하게 뻗어 나온 대나무 빨래 건조대, 빨래판, 변기솔 등이 부가오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무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하다.
마당부터 중청(中厅), 그리고 양측의 곁채, 부엌을 지나 어두컴컴한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팅즈젠(亭子间)’이 나온다. 팅즈젠은 계단 사이의 작은 다락방으로 루쉰 등 유명 문인들을 배출한 공간이기도 하다. 팅즈젠을 지나 나오는 안채 창문을 통해 손을 뻗으면 바로 앞 건물에 손이 닿을 듯하다. 부가오리의 가까운 골목 구조는 상하이 농탕의 사상과 연결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徐汇区陕西南路287弄
가장 낭만적인 골목길, 란니농탕(蓝妮弄堂)
사연을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골목길의 이름을 듣고 나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란니(蓝妮)는 소수민족 윈난 먀오왕(苗王)의 공주로 중국 혁명가 쑨중산(孙中山) 아들 쑨커(孙科)의 비서이자 두 번째 부인이다. 란니농탕, 장미별장(玫瑰别墅)은 쑨커와 란니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로 여겨진다.
농탕 안에는 3층짜리 우아한 분위기의 서양식 건물이 7채 있다. 각 건물들은 자신만의 매력을 내뿜고 있다. 바닥에 새겨져 있는 ‘장미’라는 글자 때문에 장미별장으로 불리기도 해 로맨틱한 느낌을 더한다.
∙ 徐汇区复兴西路44弄
가장 신비로운 골목길, 위위안루 749농(愚园路 749弄)
위위안루 농탕은 세 채의 신비한 별장이 전부다. 입구는 상하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골목 풍경으로 잡화를 파는 작은 매점들이 즐비해 있다.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이 곳은 일단 들어서면 뜻밖에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펼쳐진다. 이런 이유로 과거 상하이 3대 비밀요원은 이곳을 요새로 삼았다.
리스췬(李士群), 저우푸하이(周佛海), 우쓰바오(吴四宝) 등 상하이 비밀요원들은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는 위위안루 농탕에 몸을 숨긴 것으로 전해진다. 농탕 내부는 크고 작은 골목들이 마치 ‘주골목-측골목-작은측골목-어두운통로-주골목’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혼돈의 역사가 만들어낸 신비한 이 골목길은 지금은 눈부신 햇볕 아래 가장 보통의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스쳐 지나간다.
∙ 静安区愚园路749弄、395弄、1376弄
가장 혼잡한 골목길, 톈즈팡(田子坊)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톈즈팡은 1930년 상하이 특색이 가득한 작은 골목길로 시작됐다. 최근 들어 작은 갤러리를 비롯한 커피숍, 바, 상점 등이 들어서면서 중국과 서양의 분위기가 혼재되어 있는 거리로 자리잡았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상하이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고 젊은이들은 패션을 온 몸으로 느낀다. 톈즈팡의 ‘농탕 스토리’는 지금도 매일 새롭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톈즈팡은 타이캉루(泰康路) 예술제의 패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갈수록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톈즈팡을 향하고 있어 ‘상하이에서 가장 핫한, 가장 분위기 넘치는 농탕’으로 불리고 있다.
∙ 黄浦区泰康路210弄
가장 진실된 골목길, 완이팡(万宜坊)
충칭루(重庆路) 고가도로 아래 굳건히 상하이 스타일(海派风格)을 지키고 있는 완이팡은 항일구국운동의 지도자 저우타오펀(邹韬奋) 고거(故居, 옛집)로 이름이 알려져있다. 완이팡에는 호화롭고 세련된 서양식 별장도, 비바람 몰아치는 역사적 배경도 없다. 하지만 진실되고 심플하며 겸손한 매력이 가득하다. 바로 이 때문에 저우타오펀이 이곳에서 생애 가장 평범하고 진실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닐까.
지금의 완이팡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생활의 맛을 보여준다. 농탕 입구의 재봉사, 그리고 길거리 간식을 파는 소상인들까지 상하이 본토 생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 黄浦区重庆南路205弄
가장 이국적인 골목길, 신화별장(新华别墅)
상하이 다광밍(大光明) 영화관, 궈지판뎬(国际饭店)을 설계한 헝가리 건축가 우덱(L.E.Hudec)이 1930년대 설계한 농탕으로 당시 수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서양의 색채가 짙은 이곳은 ‘외국 농탕’으로 불리며 상하이 골목길에 다채로움을 더했다.
신화별장의 골목길 두 갈래는 알파벳 ‘U’자 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농탕에 들어서면 유럽 마을을 연상시키는 정돈된 설계와 특유의 고요함,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시내 쪽에 위치해 있지만 지저귀는 새 소리와 향긋한 꽃내음을 맡을 수 있어 마치 외부 세계와는 독립된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농탕 안에는 수십 여 채의 주택 화원들이 서로 다른 풍격을 자랑하고 있다.
∙ 长宁区新华路211弄、329弄
가장 신식의 골목길, 징안별장(静安别墅)
징안별장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신식 농탕으로 시내인 징안구(静安区) 쪽에 위치해 있다. 1930년대 별장이 지어진 당시 중∙서양이 혼재된 건축 양식과 높은 임대료로 명문 귀족, 사회 유명 인사가 모이기 시작하면서 상하이에서 유명한 귀족타운(富人区)을 형성하기도 했다. 중국 근대 사상가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바로 이곳에서 혁명 활동과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아이링 소설 《색계》(色戒) 원작에 나오는 인도 보석상과 카이스링(凯司令) 커피숍도 징안별장 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색계’의 리안(李安) 감독은 실제로 이곳에서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중 카이스링은 상하이의 라오즈하오(老字号, 역사가 깊고 전통 있는 상점)로 90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같은 자리에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징안별장은 건너편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 메이롱전(梅龙镇), 헝롱광장(恒隆广场)의 화려함과는 대조되게 상하이식(海派) 생활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징안별장의 빛 바랜 붉은 벽돌은 세월의 세례를 받으며 역사와 변천의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 黄浦区南京西路1025弄
이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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