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풍(風), 상하이에서 일으킨 작은 바람이 낙양까지
지난달 29일부터 31일까지 2박 3일간 상해한국학교 학생 27명과 지도교사 4명은 허난성 낙양의 낙양화양국제학교를 방문해 교류활동을 진행했다.이 두 학교의 교류는 해마다 정례화된 것으로 서로 다른 학교 문화와 중국과 한국 문화를 상호 이해하는 좋은 기회로 여겨왔다. 이런 호평은 해마다 교류를 신청하는 학생들의 증가로 이어져 올해는 교류프로그램 계획서 심사를 통해 활동에 참가할 학생을 선발해 더욱 참신하고 내실있는 교류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번 교류는 크게 3가지 활동으로 구성됏다.운대산, 소림사, 용문 석굴 방문을 통한 중국의 자연‧문화 이해활동, 낙양군관학교터 방문을 통한 중국 속의 한국 독립운동 역사 체험활동, 마지막으로 낙양화양국제학교를 방문해 교류 공연과 친선 농구 게임을 통한 상호 교류활동이다. 특히 올해는 예년에는 방문하지 않았던 낙양군관학교터를 방문해 역사에 씻겨 이미 흔적도 없어진 그곳에서 일제 강점기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사를 되돌아 볼 수 있어 더욱 뜻깊은 활동이 됐다.
낙양군관학교와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
낙양군관학교, 어떻게 이렇게 먼 곳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역사적인 발걸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3년 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33년, 일제가 상하이사변을 일으키고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전승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서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단원인 윤봉길은 사열대 위로 폭탄을 던져 일본 고위 간부 한 명을 즉사, 나머지 간부들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며, 국내외로 큰 혼란을 가져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한국인의 독립 투쟁 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고 김구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구내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고, 낙양 군관학교에 한인 반을 설립할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1934년, 낙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립됐다.
중국은 한인 청년들을 중국인 학생으로 취급하고 식비, 학비 등을 일체 지원해줬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지원을 넘어서서 정훈과 교련 또한 중국식으로 가르치려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에서는 이를 반대했고, 경비와 교사만 제공해 주면 한국인 교관으로 한국의 실정과 분위기에 맞게 정치와 군사훈련을 맡겠다고 주장해 학생의 정치 및 군사훈련은 한국인 교관이 담당하고, 경영은 중국 측에서 담당하게 됐다.
비록 일본이 한일반의 해체를 요구해 62명의 1기생 밖에 산출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졸업생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대내외로 활동하게 했다. 또한 중국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이나 장교 후보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지금은 미사일 연구소여서 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다가 앞에 세워진 비석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에서 일으킨 작은 바람이 중국 천지를 흔들고 낙양까지 닿아 훗날의 한국 독립운동의 발돋움 대가 됐다는 점에서 지금, 상하이에 거주 중인 우리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의 호(號)처럼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세상에 맑은 향기를 퍼뜨리는 윤봉길 의사의 족적을 낙양에서 확인하고 되새길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됐다.
김나영, 김서진(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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