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학교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만 연필을 쓰고 3학년부터는 연필대신 만년필과 수성펜을 쓴다. 수정액을 못쓰게 하기 때문에 글씨 쓸 때 정말 많은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3학년이 되면서 글씨 틀릴까봐 온 정성을 기울이던 둘째 아이는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친구한테 받아온 ‘可擦笔’(커차비)를 보여주며 타오바오에서 사달라고 한 적이 있다. 한자 그대로 ‘지울 수 있는 펜’이다.
친구가 줬다는 펜을 한 번 써보니 잘 써지고 지워지기도 잘 지워졌다. 나는 얼른 주문을 해주려고 검색을 해 보니 펜 값이 생각보다 비쌌다. 0.5m 한 자루에 12위안. 좀 비싸지만 꼭 필요하다니 사 줄 수 밖에. 4학년때는 0.38m의 가는 펜에 눈을 뜨면서 더 이상 0.5m는 필요 없다며, 모든 펜을 0.38m로 사달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펜으로 사주고 싶어 타오바오에 들어가 아이가 원하는 0.38m펜을 검색했다. 한 자루에 23위안! 10위안짜리도 있었지만 아이가 원하는 건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는 23위안짜리였다. 그림만 빼면 똑같은 펜인데 가격차이가 13위안이나 나다니. 암만 일제여도 23위안은 용납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이 비싼 펜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이 펜이 일제라는 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으며, 가장 쉽게 살 수 있는 펜이기도 했다.
이번 학기에 5학년이 된 둘째 아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평소 즐겨 쓰던 펜을 사달라고 했고, 나는 다시 한번 지금의 한일관계를 설명하며 국산 펜을 사주겠노라며 타오바오에서 한국 펜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D사에서 나온 0.3m 펜이 있길래 바로 주문했다. 새로 산 펜으로 숙제를 하던 아이는 왜 두꺼운 펜으로 샀냐며 쓰기를 거부했다. 분명 0.3m라고 쓰여 있는데 0.5m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다스나 샀는데.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에는 분명 다른 좋은 펜들이 많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타오바오를 뒤져 이번엔 중국 펜을 사보았다. 얇게 써지는 것이 일단 합격이다.
요즘 들어 느낀 거지만 중국 문구류의 발전은 가히 비약적이라 할 수 있다. 뚝뚝 부러지는 건 기본이요, 나무가 갈라지거나 쪼그라들었던 연필이 언제 그렇게 좋아졌는지, 得力(DELI)나 晨光(M&G)제품은 이제 믿고 사도 될 만큼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한다. 필기류뿐만 아니라 노트류에 사무용품까지 저렴한 가격에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다.
중국제품에 감탄하고 있노라면 지금 내가 중국산을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가. 저쪽 섬나라 제품만 아니면 되는건가? 내가 이 펜 하나로 지금 애국심을 논하고 있는 건가. 중국에서 중국제품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이 꼬리를 무니 끝이 없다.
애국은 해야겠고, 펜은 저렴하고 잘 써지는 남의 나라 제품이 사고 싶고, 펜 하나 사서 쓰는데도 만감이 교차한다. 애당초 한국 D사 0.3m가 좋았더라면, 엄한 곳에 원망을 돌리며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로 오늘도 얇게 잘 써지는 중국 펜으로 글씨를 써 내려간다.
반장엄마(erinj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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