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정원을 전시장에서 걸어보지 않을라우?”
반가운 M언니가 소식을 전해왔다. 나에게는 생소한 알렉스 카츠Alex Katz라는 화가의 한 전시회 소개 기사 제목을 익살스럽게 흉내 낸 언니의 제안이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앞 뒤 안 보고 코로나 시국을 뚫고 날아왔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조금 무료 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일단 언니가 걸어준 링크의 기사를 훑어봤다. 94세 뉴욕 미술계의 노 작가이며 남성 화가 그리고 심지어 “꽃Flowers”을 주제로 한 전시회라니. 며칠 지나 곧 눈이라도 내릴 듯 꾸물거리는 어느 오후, 여전히 특이한 이 조합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채 우리는 전시장으로 연결된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담한 전시장, 밝은 조명, 그 아래 주황, 연두, 노랑색 꽃 그림들과 마주한 순간 나는 이내 쌀쌀하고 꿉꿉한 바깥 세상의 공기 따위와는 깨끗이 이별해 버렸다.
전시장에 비치된 자료에 따르면 ‘1950년대에 알렉스 카츠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의 뉴욕 미술계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고 속에서 카츠는 미국의 현대적인 삶을 담백한 필치로 담아내며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발전시켰다. 카츠는 영화와 빌보드 광고, 음악, 시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서 영감을 얻었으며, 당시의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강렬한 색조와 편편한 화면이 돋보이는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카츠의 회화는 여러모로 앤디 워홀Andy Warhol과 같은 팝 아티스트와의 형식적, 개념적 관련성을 떠오르게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은 회화적이고 현실을 관찰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의 꽃 작품들과는 다른 이 새로운 꽃 시리즈는 펜데믹이 시작된 후에 그려진 것인데, 작가는 이 시리즈를 통해 펜데믹에 지친 세상을 어느 정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연의 빛을 맘껏 받아들인 꽃에 밝은 색상을 부여하는 방식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업과 닮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접한 카츠의 작품은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꽃의 주요 특징만을 잡아내고 있다. 꽃의 밝고 선명한 색감은 유화 물감으로 온전히 묘사하기 쉽지 않은데, 이는 물감을 섞는 과정에서 선명했던 안료가 기름에 의해 탁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색상의 명도를 높이기 위해 보색을 사용해 신중하게 색의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각 색상의 역할과 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 작품들이 보여주는 최대한 절제되고 단순화한 꽃의 ‘형상과 부피 자체의 묘사’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작가는 꽃의 음영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고, 먼저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음 획을 더하는 ‘웻 온 웻(wet on wet) 기법을 사용하여 신속하게 작업한다고 한다. 이는 작가의 전매특허 같은 기법인데 작품에 ‘즉각성’이라는 요소를 더해 주기도 한다.
밝고 화사한 색상의 꽃 그림들에 빠져 들어 걷고 있던 나의 시선이 이번엔 전시장 중앙에 걸려있는 초상화에 강하게 이끌린다. <밀짚모자 3(Straw Hat 3, 2021)>을 비롯한 몇 점의 초상화 또한 밀짚모자를 쓰고 정원을 산책 중인 듯한 인물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주 가깝게 클로즈업한 것 같이 보인다. 이러한 구성 기법은 마치 눈 앞에 실존하는 대상과 마주하고 있는 듯, 섬세하며 특별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중(二重)의 초상화로 구성된 작품 속 인물은 윙크 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현실적이지만 완전히 현실적이기만 하지 않은, 매우 간결한 터치로 완성된 초상화 속 여인은 오히려 강렬함과 당당함으로 나를 압도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운은 길었다. 간결하고 화사한 색감의 작품이 주는 전환과 감동이 작가의 마음과 함께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우리는 뭔지 모를 충만함과 위안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하이디(everyday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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