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상하이로 돌아올 날짜가 다가오면서 걱정만 늘어갔다. 한국에 갈 때는 상하이에 남아있을 가족들이 걱정되었는데, 다시 상하이로 돌아올 때가 되니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코로나19 전에는 매년 아이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 동안 한국을 다녀왔었다. 한 달 가량 머물다 와도 늘 시간에 쫓겼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거리며 여기저기 다니고, 못 만났던 지인들도 보고 오려면, 정작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얼굴 볼 수 있는 시간들이 많지 않았다.
이번에 오롯이 혼자 한국을 방문했던 기간은 나의 원가족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의 코로나19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가급적 외출도 삼가다 보니 하루 종일 집에서 친정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왔을 때는 아이들 챙기느라 들여다볼 수 없었던 노년 부모님의 일상을 초밀착 체험하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부모님이 매일 아침에 드시는 영양제도 함께 먹고, 다음 끼니는 무엇으로 때워야 하나 의견을 나누고, 부모님이 즐겨보시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밤마다 엄마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면 하루가 지났다. 아빠의 건강 걱정과 병간호에 대한 피로, 스트레스, 엄마의 동창들 소식, 그 동창들의 자녀 이야기, 유난히 고달팠던 고부간의 갈등으로 평생 쌓인 한까지. 평소 속 이야기를 잘 안 하시던 엄마도 이제 같이 늙어가는 딸 앞에서는 숨길 것도,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훌훌 털어놓으셨다. 어쩌면 둘만의 밤 수다 시간이 언제 또 올까 하는 생각도 하셨을 것이다.
어느 날은 친정 아빠께서 서재로 부르시더니 틈틈이 써 놓으신 글을 꺼내 보이셨다. 읽을 만 한지 한번 보라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미시는 그 글들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아빠의 젊은 시절의 꿈과 추억들이 담겨있었다. 언젠가 딸에게 보여주시려고 차곡차곡 모아놓으셨을 원고를 보며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로 의무적인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아빠께서는 진득한 교감을 바라셨을 것이다.
동생들과 조카들도 전보다 더 자주 만나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알아서 야무지게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동생들도 전화 상에서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며 고민을 나눴다. 그 동안 자기 가족들 챙기느라 급급했던 무신경한 언니였던 것 같아, 또 미안했다. 동생들 마음고생 하나 헤아리지 못하면서 다른 곳에서 허튼 짓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상하이로 입국해 이 주간의 호텔 격리 기간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큰 창이 있어서 오전에는 환한 햇살이 방 안 가득했고, 밤에는 썩 괜찮은 야경이 펼쳐졌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최소한의 의무적인 일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게을러 본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공식적인 허락의 시간. 그리고 한국에서의 유유자적했던 생활에서 상하이의 분주한 현실로 돌아오는 중간의 다리이기도 했다.
결국, 부모님께도 나 자신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써서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 있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 현실로.
레몬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 상하이방(http://www.shanghaiba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