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쓸 때쯤이면 봉쇄가 풀려있기를 희망했다. ‘희망했다’고 쓴 이유는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우려를 이미 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술학원에 갔다가 갑자기 건물이 봉쇄되어 6일 동안 갇혀 있던 제자와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도, 봉쇄 전에 가까스로 가족이 출국하고 혼자 남은 고3 제자와 장을 봐서 숙소에 넣어주면서도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인사말은 “먹는 건 괜찮으세요?”가 되었다. 기약 없이 길어진 봉쇄로 인해 나름 열심히 쟁여 놓은 식료품들도 떨어져 가고, 공구방들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예전에 어른들을 만나면 “밥 먹었냐?”고 물으셨는지, 국경을 초월해서 “吃饭了吗?”라고 인사하는지 너무 이해가 잘 가는 요즘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을 아이들의 지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재작년 기억이 떠오른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할 무렵, 시어머니 팔순을 쇠러 2~3주 예정으로 한국에 갔다가 10개월 동안 발이 묶였었다. 그때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게 된 호야(가명)는 수학을 제일 잘하는데 수학이 제일 싫다고 했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부터 숙제가 너무 많다고 힘겨워했다. 그래서 내가 내준 숙제가 ‘하루 한 번 산책하기’였다. 문제를 풀지 않아도 글을 쓰지 않아도 되니 아이는 순순히 응했다.
시키지 않아도 매일 산책하러 나가 꽃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길고양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산책 나갈 때마다 만나는 길고양이를 위해 아이는 간식을 주머니에 넣어서 나가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고양이들이 마실 물도 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아예 엄마랑 같이 사료와 생수를 들고 나가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가족이 되었다. 사진들도 예쁘고 그 마음도 너무 예뻐서 블로그에 기록해보자고 권했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과 다른 생명을 돌보는 블로거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라도 나가서 스트레스를 풀 수가 있었는데, 도시 전체가 봉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온종일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그 아이들을 돌보며 삼시 세끼 챙겨 먹여야 하는 어른들도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그래서인가? 요즘 새로 들은 인사말이 “슬격하고 만나요”다.
핵산 검사를 하러 나가서야 해바라기를 하고 봄꽃 구경도 할 수 있는데, 확진자가 같은 동에서 나와 그나마의 기회도 없는 가족에게 주방 쪽 창 밖 좀 내다보라고 문자를 보냈다. 뭔 일인가 싶어 내다보길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트도 만들고 주먹도 흔들어 보였다. 왠지 찡했다.
“잠깐인데 넘 행복했어요. 슬격하고 만나요, 쌤”
군인들이 “단결!”하고 거수경례하듯이 “슬격!” 하고 거수경례를 해야 할 것 같은 인사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슬기롭게 이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공항 패션 대신 핵산 패션을 과시하기도 하고, 구호품 식자재로 (요리가 아니라) 설치미술 감각을 뽐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봉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음식 플렉스’로 염장을 지르기도 하고, 엄마아빠표 놀이와 교육으로 “리스펙트”를 연발하게 만들기도 한다. 재주 많은 어떤 동생은 그림일기를 써서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또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보를 공유해주는 열정 많은 후배도 있다.
그리고 신선한 채소 수급이 어려워지니 지혜롭고 바지런한 엄마들은 집안에서 파도 심고 당근과 배추 밑동도 심기 시작했다. 심지어 녹두 싹을 틔워 숙주나물을 만들어 먹는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오기도 한다. 나도 마지막 먹은 상추의 밑동을 컵에 심어 놓았더니 제법 예쁘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나는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채소 가꾸기를 제안했다. 물만 주면 잘 자라니 사진을 찍고 관찰일지를 써보자고 말이다. 관찰력도 기르고 과학 공부도 되고 글쓰기 표현력도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건 사실이나 아이들에게 뭔가 생기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엄마들이 이 숙제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고 걱정하던 아이가 하얀 고구마 뿌리를 보여주며 웃는다. 자기가 심은 양파에 ‘니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꼼꼼하기 그지없는 관찰일지를 쓰는 친구도 있다. 이 시간을 지나며 아이들의 마음도 한 뼘쯤 자라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격리 기간 동안 상하이에서 며칠 안 되는 봄 날씨가 지나간다. 눈이 빠져라 공구방을 들여다보며 광클릭을 해야 하긴 하지만 급한 식료품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 둘 봉쇄가 해제된 지역도 생기는 것 같다. 한편에서는 물건을 배송하러 상해에 들어왔다가 봉쇄되어서 도로에서 며칠째 노숙을 하는 트럭 운전사들도 있고, 먹을 것도 없이 고립된 유학생들의 사연도 있고,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흉흉한 영상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부족한 음식이나 물품을 나누는 훈훈한 미담도 있고, 공구 물품을 배송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취약계층을 돕자고 만든 후원방에 순식간에 200명 넘게 쇄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마음을 돌보고 지혜롭게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법도 배운다. 아직도 힘들고 답답한 상황이긴 하지만,
“슬격하고 만나요!”
(2022.4.13)
김건영(thinkingnfuture@gmail.com)
맞춤형 성장 교육 <생각과 미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