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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운 | 교유서가 | 2021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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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길은 제목이 이뻐서. 두 번째 눈길은 표지도 이뻐서.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라니. 벚꽃으로 하얗고 달큰하게 들뜬 밤처럼 적당히 설레고, 적당히 따뜻한 소설이려니 했다. 황시운,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막 등단한 신인인가 보다 했다. 순전히 제목과 표지에 끌려서 산 책.
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제목과 표지를 몇 번이나 한참을 쳐다봤다. 핵폭탄급 반전이라고나 할까. 소설인데 지독히도 소설이 아니었다. 도리질 쳐 외면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이 이 작고 이쁜 책 안에 들어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 ‘매듭’부터 심상치 않았다. 암벽등반을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남자의 추락사고.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자 옆에서 생계와 간호를 책임지고 있는 약혼녀.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한없이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 한 문장, 한 문장,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내공이 있었다.
작가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때까지 작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조차 몰랐다. 작가에 대한 정보없이 쭉 읽어보려고 했으나,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황시운 작가는 10년 전 문학상을 수상하며 멋지게 신인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 동료 작가들과 야간산행 중 추락사고를 당하고 하반신 마비가 된 여성 작가였다. 이 소설집은 사고 후 10년 되던 2021년에 나온 책이다. 10년 동안 몇 차례의 큰 수술을 거치고 생사를 넘나들며 매일매일 죽고 싶었지만, 소설만은 쓰고 싶었던 작가의 이야기였다.
문체는 담담하지만, 인물들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서 작품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그 감정선에 푹 빠져 읽게 된다. 고독사, 묻지마 살인, 학교폭력, 청소년성매매 등…. 소재도 다루기 쉽지 않은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우리가 외면하는 불행과 절망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그 눈길은 덤덤하나, 이해하고 싶고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 따스함이 바닥에 깔려 있다.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그랬듯 생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좌절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쓰고 또 쓸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이들보다 느릴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일어설 수조차 없고 매 순간 끔찍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소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이 낡아버렸다 해도, 아직은 봄밤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김경은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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