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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네이버웹툰 ‘연애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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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하자마자 아들은 누나가 있는 서울로 가겠다고 졸랐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그렇게 가버렸다. 누나보다는 미리 한국 들어간 여자 친구 때문임을 안다. 아들은 연애를 좀 잘하는 거 같다. 11학년인데 벌써 세 번째 여자 친구와 사귀고 있다. 하루를 사귀어도 사귄 거라고 하니 어쨌든 세 번째라면 세 번째로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 친구와는 한번 헤어지고 나서 다시 사귀게 된 거란다.
아들이 기질적으로 순하고 항상 결별을 통보받던 경우란 걸 알아서 여자애가 먼저 다시 마음 바꾼 거냐 물으니, 본인이 적극 연락했다고 한다. 아이한테 이런 용감한 면도 있었구나 싶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엄마인 나한테는 그 여자애와 다시 만나고 있다고 넌지시 한마디 알려주는 정도였지만 당사자야 얼마나 롤러코스터같이 기복 심한 감정을 경험했을까.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남녀학생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면 담임선생님들이 노심초사하시며 양쪽을 각자 찾으셔서 너무 일찍 연애에 빠지면 대학 진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둥 사태의 경각성을 경고하셨다. 사춘기 때의 연애를 엄청나게 위험한 독초처럼 인식시키려고 애쓰셨고 그 당시 아이들의 ‘청춘사업’에 많은 훼방을 놓으셨다.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선생님들은 꽤 재미있었을 이런 설득의 과정을 내심 즐기지 않으셨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나도 그때 선생님의 적극적인 상담을 여러 번 받고는 고등학교 때 누굴 좋아하는 건 크게 잘못된 일이구나 어리둥절해졌던 거 같다. 선생님들의 집요한 추적과 노력에도 고등학교 동기 80여 명 중에 그때 몰래 사귀던 커플 중 세 쌍이나 결혼했고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그때는 선생님들부터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거의 탐정 수준으로 살피셨는데 요즘 MZ세대라고 일컫는 젊은이 중 많은 수는 연애에 관심도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찍 연애에 소극적인 남자들을 가리켜 ‘초식남’이라고 한다는데 이를 넘어서 아예 연애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의 ‘절식남’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한다. 연애 풍속도가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것이다.
생존이 어려울 때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건 생태계의 습성이라 하니 이 또한 치열한 경쟁사회로 내몰려서 메말라가는 어린 인류 자체의 선택일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열정과 용기마저 앗아간 세상이 무엇보다 답답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실한 사랑을 알았으면 좋겠단 안타까움이 든다.
박완서 작가가 젊은이들의 애정행각을 보시고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라고 적으신 글이 기억난다. 그렇게 낭비할 수 있는 젊음이야말로 가장 활기찬 생명력이 아닌가.
카뮈와 왕쇼오보(王小波)가 연인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며 사랑에 빠진 인간의 순수한 정열과 아름다움을 거듭 느낄 수 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가장 뜨겁고 농밀한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대할 때 자신이 얼마나 정열적이고 이타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깨달아가는 경이로운 과정 또한 세상사를 알아가는데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삭막한 세상이 그래도 꽤 살만하고 사랑스럽다고 느끼게 되는 건 결국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 주변인과 깊은 교감에서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믿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소이(mschina05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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