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이 흔치 않았던 시절, 아버지는 업무상 해외 출장이 잦으셨고, 출장 다녀오신 트렁크를 열 때마다 나는 애써 흥분을 참으며 바싹 다가앉아 눈을 반짝이곤 했다. 가방 속엔 당시 국내에선 찾기 힘든 고급진 디자인·소재의 예쁜 옷이나, 이국적인 수십 가지 색상의 색연필 세트, 팬시한 소녀 취향의 필통 세트도 있었고,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구입하셨다는 풍경화가 나오기도 했다. 출장 가기 전 아버지는, “이번엔 뭘 사올까? 뭘 갖고 싶니?”라고 물어보시곤 하셨다.
어느 날엔가 미국 출장 가시기 전 내게 주신 질문에, 당시 팝송을 즐겨 듣던 나는, ‘괜찮은 가수’의 카세트테이프를 주문했었다. 그 때 아버지가 음반가게 점원에게 물어 골라 사 오신 테이프 중 하나가 돈 맥클린(Don MacLean) 히트곡 모음집이었다. 푸른색 셔츠를 입은 아직 젊은 그가 환하게 웃고 있는 커버 사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맥클린 노래 중에선 얼마 전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불렸다는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도 신나고 유쾌해서 좋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서정적인 ‘빈센트(Vincent)’이다. 처음 들을 땐 설마 고흐를 두고 만든 노래인 줄 몰랐었다. 어릴 적 위인전집에 포함돼 있던 ‘고흐’ 편을 읽고, 자기 귀를 자르다니 웬 끔찍한 미치광이인가 싶었고, 그런 어두침침한 광인(?)보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다재다능한 천재가 더 멋있어 보였다. 훗날 시간이 가고 어른이 되면서, 그의 외로움과 그가 표현코자 했던 아름다움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살면서 세상의 많은 지역을 가봤지만, 결혼 전 어느 해 여름, 동생과 다녀온 프로방스 여행이 최고였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취를 흠뻑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 등 그의 그림 중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밤의 어두움에 대비되는 황금빛 ‘별’들은 마치 삶이 팍팍하고 힘들수록 꿈과 희망은 더 빛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외우고 다녔던 문학소녀(?)였던 내가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강렬한 ‘별’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화가 고흐가 상하이에 왔다. 그것도 디지털 옷을 입고. '반 고흐 얼라이브(Van Gogh Alive)' 전시회. 6월 어느 날, 상하이 엑스포 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이 전시회에 우리 진출 기업 대표 분들과 함께 방문했다. 고흐의 미술 작품, 친필 원고, 편지 등을 멀티미디어 형식으로 전시해 요새 유행하는 ‘몰입형 체험’을 하게 해 준다. 고흐가 머물렀던 아를르의 작은 방과, 그가 그렸던 해바라기 밭을 지나 디지털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그의 글과 그림으로 가득한 수많은 화면이 사방에 펼쳐진다. 그곳의 모든 면(面)이 캔버스이고 도화지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있으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홍콩, 도쿄, 싱가포르 등을 능가하는 아시아의 문화중심으로 떠오른 상하이로, 각국 유명 공연과 전시팀들이 몰려들고 있다. 상하이가 좋은 또다른 이유다. 지금 이곳 동방의 진주 상하이에서 150년 전 네덜란드 사람 고흐를 영접하고 싶다면, 그의 작품과 맥클린의 ‘빈센트’를 좋아하면서 필자처럼 새롭고 특이한 걸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말해주고 싶다. “이 전시회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