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37]
‘사전오기’의 신화, 홍수환
얼마 전 파나마의 국회의원 엑토르 카라스키야 씨가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 말이 왜 생겼는지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별 생각 없이 가끔 쓰는 ‘사전오기(四顚五起)’란 말이 생겨나게 한 카라스키야가, 권투선수가 아니라 한 나라의 국회의원으로서 방문한 겁니다.
우리나라가 아직 여러모로 시원찮던 1977년의 일입니다. 홍수환이란 권투선수가 멀리 파나마까지 나가서 두 번째 세계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영화의 한 장면보다도 더 멋지게…….
그 경기에서 홍수환 선수는 2회에만 네 번이나 다운되었습니다. 처음 한두 번이야 얼떨결에 당한 거겠거니 하고 숨을 죽이면서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세 번, 네 번…… 잇따라 큰대(大)자로 뻗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는, 이젠 다 끝났다며 하나 둘 텔레비전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3회가 시작되자마자 이번에는 홍수환 선수가 상대편을 느닷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입니다. 뜻밖의 공격에 어리벙벙해진 상대 선수는 숨도 못 돌리고 무수히 얻어맞다가 마침내 바닥에 완전히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방송마다 그 장면을 몇 날 며칠을 두고 골백번쯤 되풀이해서 방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싫증내기는커녕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또 보고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신바람 나는,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도 더 극적인 경기였습니다. 그 무렵처럼 권투가 인기 있었던 적도 없었을 겁니다.
‘사전오기’란 말은 바로 이때 생겨났습니다. 홍수환 선수가 네 번 쓰러졌는데도 그때마다 일어나서 마침내 상대를 때려눕혔으니, ‘칠전팔기(七顚八起)’가 아니라 ‘사전오기(四顚五起)’라는 거죠. 그러나, 사실은 이야말로 ‘칠전팔기’라는 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였습니다.
‘칠전팔기’라는 말은 이렇게 셈해야 옳습니다.
‘한 번 쓰러졌다 두 번째에 일어나고, 세 번째로 다시 쓰러졌다 네 번째 일어나고, 다섯 번째 쓰러졌다 여섯 번째 일어나고, 일곱 번째 쓰러졌다 여덟 번째 일어나는 것’-이것이 바로 칠전팔기의 본뜻입니다. 그러니까 홍수환 선수는 틀림없이 ‘칠전팔기’했던 겁니다. 사실 ‘칠전팔기’라는 말은 이 밖에 다른 풀이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도 ‘사전오기’가 옳다고 우긴다면 문제가 또 있습니다. ‘사전사기(四顚四起)’라면 서양식 왕복 개념으로 따져서 말이 되겠지만, ‘사전오기’는 아무리 따져 봐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전오기’를 만들자면 먼저 누워 있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한 번 일어나고 나서 한 번 쓰러지고, 다시 두 번 일어나고…… 이렇게 따져야 네 번째 쓰러지고 다섯 번째 가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워서 경기를 시작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격투기도 아니고.
어쨌든 ‘사전오기’란 말은 비록 사전엔 올라 있지는 않지만, 아직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버젓이 쓰는 걸 곧잘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삼전사기’니 ‘오전육기’니 하여 재치 있게(?) 응용하는 것까지 눈에 띕니다. 이번에도 카라스키야 씨가 오자 신문, 방송마다 또 다시 ‘사전오기’의 신화를 추억하기 바빴습니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말광을 넓힌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듯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만들어서는 곤란합니다.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데서 말장난을 하는 것조차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적지 않은데, 모범을 보여야 할 언론이 이런 몽매한 표현을 써서는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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