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 40]
‘망년회’에서 부를 ‘18번’은 다들 준비하셨나요?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이 돌아왔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1년의 마지막 달일 뿐인데도 해마다 이맘때면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들 느끼시듯이 올해는 뭐라 할 말이 따로 없는 그런 기막힌 한 해였지요.
황당하리만큼 무능하고 염치없는 한 인간과 그 주변 사람들은, 까도 까도 끝이 없는 데다가 벌인 일마다 상상했던 한계를 훌쩍 뛰어 넘는 초특급 비리와 추악한 소문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 남우세스럽고 더러운 꼴을 지켜보면서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동안, 어떤 막장드라마도 이루지 못했던 최고의 시청률과 아울러 눈과 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를 외면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단 며칠 사이에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는 엄청난 위업을 이루어냈으니, 온몸 바쳐 국민 정신교육에 이바지한 크나큰 공로를 길이 기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데로 흘러갔습니다. 하긴 요즘은 무슨 얘기를 하든 다 ‘기-승-전-최순실’, 아니 ‘기-승-전-박근혜’가 되더군요. 허허.
사정이 이러하니 올 12월은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 동창들이나 또는 같이 땀 흘려 일한 동료들과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나누는 감회가 더욱 새롭겠지요. 이렇게 여럿이 모여 음식을 먹으며 한 해를 보내는 자리를 보통 ‘망년회(忘年會)’, 또는 ‘송년회(送年會)’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망년회’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그 뜻을 살펴보면, ‘(만사 골치 아프니 술이나 퍼 마시면서) 올해를 몽땅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모임’쯤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잊을 망(忘)’ 자에는 지난 일은 그저 잊는 것이 상책이라는 다소 무책임한 생각이 배어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 ‘망년회’란 말은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 건너온 말인 까닭에 더욱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 말은 속보다는 겉을, 실체보다는 감각을 중시하는 ‘일본스러운’ 정서가 잘 드러나는 그야말로 ‘일본스러운’ 말이거든요.
다들 나름대로 힘들여 지내온 한 해이니만큼 좋은 일, 보람찬 일뿐 아니라 궂은 일, 힘든 일까지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면서 한 해를 고이 보내고, 그러고 나서 비로소 다가오는 새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경건하게 맞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망년회 대신 ‘송년회(送年會)’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자, 이제 송년회 자리를 노래방으로 옮겨 봅시다.
오색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노래방에 들어서면 저처럼 뒷전에 숨어서 차례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스스로 ‘18번’을 멋들어지게 뽑아내기 바쁜 사람도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 ‘18번’의 정체는 또 뭘까요?
이 ‘18번’이라는 말 또한 일본서 건너온 말입니다. 일본 전통극 중에 음악과 무용이 결합된 ‘가부키(歌舞伎)’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가면을 쓰는 대신 새하얀 바탕에 짙은 분장을 한 배우들이 나오는 일본 전통극’이라고 하면 아마 “아하, 그거…….” 하는 분도 꽤 있을 듯합니다.
16, 17세기에 생겨나 4백년 전통을 지닌 가부키는 여러 장(場)으로 구성돼 있는데, 장이 바뀔 때마다 막간극을 공연한답니다. 그런데 17세기에 한 배우가 자기 가문에서 내려오는 여러 가지 가부키 단막극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열여덟 가지를 추려 정리했다지요.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광언(狂言, 재미있는 희극이라는 뜻) 십팔번’이라고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열여덟 번째 것이 가장 인기가 있어 이때부터 가장 자신 있는 것,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뜻으로 ‘십팔번’이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부키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우리들이 ‘18번’을 들먹이는 것은 애당초 뜬금없는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이 말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애창곡’ 정도로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애창곡’이라... 아무래도 좀 밋밋하기는 합니다. 더 잘 어울리는 좋은 말 없을까요?
어쩌다 보니 일본말과 관련한 얘기를 자주 하게 되네요. 그만큼 우리말에는 일본말 찌꺼기가 곳곳에 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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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전교조신문(현 교육희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월간 <우리교육> 기자 및 출판부장(1990~1992), <교육희망> 교열부장(2001~2006) 등을 역임했다. 1989년 이후 민주언론운동협회가 주최하는 대학언론강좌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대학 학보사와 교지편집위, 한겨레문화센터, 다수 신문사 등에서 대학생, 기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육희망>, <우리교육>, <독서평설>, <빨간펜> 등에 우리말 바로쓰기, 글쓰기(논술) 강좌 등을 기고 또는 연재 중이다.
ccamya@hanmail.net [김효곤칼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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