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남은 민족의 요람 인성학교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 주요 도시에는 한인 밀집지역인 코리아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외국인으로 살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이곳에서 불과 몇 십 여년 전 우리 민족이 겪었을 설움과 어려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는 등 항일 투쟁의 역사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또한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심은 바로 교육이었다. 인성학교(仁成學校)는 민족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화동 지역의 민족 교육을 선도했다.
화동 지역 민족 교육 선도 인성학교
불과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 학생을 시작으로 1916년 여운형은 ‘상해기독교소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인성학교의 전신이다. 1년 후 공동조계지역인 쿤밍로(昆明路) 7 5번지에서 학교명을 인성학교로 개명, 정식으로 교민들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범했다. 초대 학교장 여운형은 학교 설립 후, 기본 재산도 없고 뚜렷한 수입원도 없어 큰 경영난을 겪었다. 재정을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어 학교 경영권을 대한교민단으로 소속을 이관시키기에 이르지만, 재정의 압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고, 인성학교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쇠도 갈면 바늘 된다’고 교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인성학교를 결코 헛되이 실패로 끝나게 두지 않았다. 여운형이 학교장을 겸임하여 오다가 1920년 자신의 동생 여운홍을 교장으로 선임한 뒤 그의 취임과 동시에 학교 육성책을 제시하면서 먼저 학교 신축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나서서 모금 활동을 벌인 것이 바로 상하이 교민단이다. 상하이 교민단에서는 학무회의를 소집하여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교육비에 대한 관심고조와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학교와 민단 간의 합심 단결로 빠른 시일 내에 학교 신축을 강행할 것을 결의하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인성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한국인의 단결력’을 바탕으로 마당로(馬當路)에 터를 잡을 수 있었고,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등의 독립 투사들의 후원을 받아 1935년 폐교될 때까지 민족의 요람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어, 한국사 과목 필수
누군가 한 민족의 뿌리와 얼은 언어와 역사로부터 비롯된다고 했던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어린 학생들의 한국어와 한국사에 대한 학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민족의식 고취라는 교육방침에 따라 인성학교는 교과목에 한국어, 한국사, 세계사 등에 치중하였고, 일본어는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교과목을 늘려 국어, 역사, 본국지리, 한문, 산술, 수공 외에 3~4학년에는 중국어와 영어가 추가되었지만, 인성학교 졸업생이 중국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교과목을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본국에서 오는 유학생이 날로 증가되어 1923년부터는 학교 내에 ‘보습과’를 설치 운영함과 동시에 인성학교를 임시정부 산하에 두어 공립학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민족의 수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높은 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내 예비강습소를 설치하고 최고의 교사진을 꾸려 교육 활동에 앞장서는 등 인성학교는 임시정부 산하의 유일한 공립학교로 민족 교육 운동을 지속해나갔다. 이 때 영어에는 김규식, 여운형, 현정건, 수학 및 산술에는 최창식과 서병호, 중국어에는 김문숙, 국어 및 역사에는 김두봉 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교사진으로 채용되었다고 하니, 선조들의 민족 교육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성학교 정신, 상해한국학교가 계승
1935년 11월 10일 선우혁 교장이 일본총영사관의 일본어교육 실시 명령에 불복하고 무기한 휴학을 선언한 이후로 인성학교는 사실상 폐교되었다. 그러나, 폐교 후에도 비록 중국계, 선교사 등의 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닐지언정 선조들의 민족 교육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하자 선우혁은 교회 인사들과 함께 1946년 홍커우취(虹口区)의 상해한국인기독교 내에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였고 1981년 다시 폐교하기까지 교민 자제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갖춘 인재로 육성하였다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성학교의 민족 정신은 오늘날 ‘세계를 가슴에 품고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자’를 교훈으로 삼아 상해 유일한 한국학교로서 교민 자녀들에게 한국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상해한국학교가 계승하고 있다.
“정신적 국가만 망하지 않는다면 형식적 국가는 망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은 나라”라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형식상의 국가만으로는 참다운 국가가 될 수 없고 그 속에 정신적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성학교는 민족교육을 통해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참다운 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고등부 학생기자 이예뜰 (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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