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⑧]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과 '푸른 하늘 은하수'
비온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손에 잡힐 듯 밝은 햇살과 더불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말갛고 푸른 하늘이 문득 한눈 가득 비칠 때 절로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가수 송창식의 시원한 목소리가 일품인 노래, ‘푸르른 날’입니다. 다들 알고 있듯이 그 유명한 시인 미당 서정주의 시를 노랫말 삼아 곡을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수십 년 동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푸르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로 작년 12월 중순까지도 ‘푸른’이 옳은 표기였기 때문이지요.
‘푸르다’는 ‘러' 불규칙 용언이므로 ‘푸르~’에 ‘~어’를 붙이면 ‘푸르어’나 ‘푸러’가 아닌 ‘푸르러’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으)ㄴ’이 붙을 자리에도 ‘~른’을 붙여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푸르른’이라고 쓰기 쉬웠지요.
‘천황을 찬양한 적극적 친일(親日) 작가’, ‘권력에 아부하는 해바라기 시인’이라는 욕된 이름을 덮을 만큼 뛰어난 시를 여럿 남긴 시인의 대표작인지라 ‘시적 허용’이라는 예외를 들먹이며 감싸는 사람도 있고, ‘시인은 언어를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주장으로 옹호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2015년 12월 14일까지는 맞춤법에 어긋난 표기였습니다.
만일 이게 옳았다면 윤극영의 동요 ‘반달’은 ‘푸르른 하늘 은하수…….’ 이렇게 불렀어야 할텐데, 아무래도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 지 딱 사흘만인 지난 2015년 12월 14일, 국립국어원에서 ‘푸르르다’도 ‘푸르다’를 강조하는 뜻을 가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이젠 틀린 표기가 아니므로 시비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애꿎게도 나름대로 열심히 쓴 제 글만 겨우 몇십 시간 만에 갑자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글이 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부랴부랴 뜯어고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참고로 이젠 ‘이쁘다’, ‘잎새’ 등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네요. 이런 말들이 여태껏 비표준어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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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전교조신문(현 교육희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월간 <우리교육> 기자 및 출판부장(1990~1992), <교육희망> 교열부장(2001~2006) 등을 역임했다. 1989년 이후 민주언론운동협회가 주최하는 대학언론강좌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대학 학보사와 교지편집위, 한겨레문화센터, 다수 신문사 등에서 대학생, 기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육희망>, <우리교육>, <독서평설>, <빨간펜> 등에 우리말 바로쓰기, 글쓰기(논술) 강좌 등을 기고 또는 연재 중이다.
ccamya@hanmail.net [김효곤칼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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