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 25]
‘넘보라살’을 아십니까?
‘산수(算數, 지금의 수학)’ 시간, 비좁은 교실 하나에 백 명 가까이 빽빽이 들어앉은 코흘리개들은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자를 대고 서투른 솜씨로 갖가지 ‘네모꼴’을 그립니다. 그 다음에는 서로 마주 보는 ‘꼭짓점’을 이어 ‘맞모금’을 긋습니다. 그러면서 ‘바른네모꼴’이나 ‘긴네모꼴’과는 달리 ‘마름모꼴’이나 ‘사다리꼴’에서는 ‘맞모금’의 길이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네모꼴을 맞모금에 맞춰 절반으로 나누면 세모꼴 두 개가 되지요.
다음은 ‘자연(지금의 과학) 시간, 선생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일곱 가지 빛 말고도 다른 빛이 더 있다고 하십니다. 무지갯빛 맨 위에 있는 빨간빛 바깥쪽으로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넘빨강살’이 있고, 맨 밑 보랏빛 바깥으로는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넘보라살’이 있다는 것이지요.
엄연한 빛인데도 눈에 안 보이는 이 빛들이 열을 전하기도 하고 살균작용을 하기도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대놓고 의심하는 발칙한 어린이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이 세상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지요.
아울러 삼대 영양소로는 녹말과 ‘흰자질’, ‘굳기름’이 있다는 것도 배웁니다. 흰자질이란 ‘달걀흰자의 주성분’이란 뜻이고, 굳기름은 ‘굳은 기름’, 즉 고체 상태의 기름이라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이 세 가지를 고루고루 잘 먹어야 키도 커지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멀건 고깃국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대부분 아이들에게 굳기름과 흰자질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인 1960년대 중반, 서울의 한 ‘국민학교’ 교실 풍경입니다. 어른 말씀 잘 듣는 ‘새 나라의 어린이’들은 책상 하나를 반으로 갈라 앉은 짝꿍과 자리싸움을 하면서도 선생님의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였습니다. 위와 같은 수학-과학 용어들은 실제로 그때 수업시간에 썼던 말들이지요.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니 이러한 순우리말 용어들은 몽땅 삼각형(三角形), 사각형(四角形), 대각선(對角線), 적외선(赤外線), 자외선(紫外線), 단백질(蛋白質), 지방(脂肪) 등 한자어로 바뀝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말은 꼭짓점, 마름모꼴, 사다리꼴 정도뿐입니다. 까닭을 잘 모르는 어린 우리는 ‘굳이 우리말 놓아두고 한자어로 다 바꿀 까닭이 있나?’, '왜 자꾸 말을 바꿔서 우리만 골치아프게 하지?' 하고 잠시 의문을 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말 용어들을 슬그머니 잊으면서 한자 용어에 익숙해졌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세모꼴’, ‘넘보라살’, ‘흰자질’ 같은 말들을 굳이 바꿀 까닭이 있었을까? 실제로 어린이들은 전혀 거부감 없이 순우리말 용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넘보라살’ 하면 ‘보랏빛 너머에서 비치는 빛살’이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였지요. 그러나 당시는 한글전용주의자들과 국한문 혼용주의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시절이라 한 세력의 차고 기욺에 따라 용어들조차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거듭했던 것이지요.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의 한글만 쓰는 것이 대세이긴 하지만, 기왕 한글을 쓰기로 작정한다면 ‘삼각형’보다는 ‘세모꼴’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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