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27)]
‘학마을’에는 ‘학(鶴)’이 없다
“.....옛날, 학마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한 쌍의 학이 찾아오곤 했었다. 언제부터 학이 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올해 여든인 이장 영감이 아직 나기 전부터라 했다. 또, 그의 아버지가 나기도 더 전부터라 했다.
씨 뿌리기 시작할 바로 전에, 학은 꼭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고는 정해 두고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 노송(老松) 위에 집을 틀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노송을 학 나무라고 불렀다.....”
이범선의 단편소설 ‘학마을 사람들’의 앞부분입니다. 195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한때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어 30대 이상이라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일제 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민족 수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개되는 갈등과 치유를 ‘학’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빌어 보여주는, 전후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 단편문학전집이라든가 학생문학전집 등에도 자주 실리는지라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아마 그 내용쯤은 대충 알고 있겠지요.
불현듯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학(鶴)’이 궁금해져서 찾아봅니다.
학은 머리 부분이 붉다 하여 ‘단정학(丹頂鶴)’이라고도 하며, 순우리말 이름은 ‘두루미’입니다. 두루미는 겨울에 날아와 봄이면 다시 북쪽으로 떠나는 대표적인 겨울철새이지요. 봄이 되면 시베리아 쪽으로 가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에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은 굳이 둥지를 틀 일도 없거니와, 설혹 튼다 하더라도 워낙 경계심이 강해서 인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즘은 비무장지대 부근 철원 평야 일대로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날아옵니다. 깃털 색에 따라 재두루미나 드물게는 흑두루미가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딱 한 쌍이 날아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소나무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친다.’고 합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학마을 사람들’에 나오는 ‘학’은 절대 ‘학’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새일까요?
학과 닮은 새로는 황새와 백로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황새는 크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귀하게 대접 받던 텃새 또는 철새였으나, 한국전쟁과 산업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70년대 초에는 충북 음성에 겨우 한 쌍만 남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중 수컷이 1971년 4월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이후 과부가 된 암컷이 홀로 1994년까지 산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새가 맞을 거 같습니다. 이제 자연 상태에서는 멸종하였지만 적어도 한국전쟁 이전에는 비교적 흔한 새였다고 하니까요. 요즘은 반달곰에 이어 종 복원 사업이 성공단계에 이르렀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립니다.
그런데, 황새로 보기에는 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도 그들은 학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학이 그 긴 주둥이를 하늘로 곧추고 '비오, 비오' 울어 고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또 하늘은 꼭 비를 주시곤 했다. 장마가 져도 그들은 또 학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학이 '가, 가' 길게 울어 주기만 하면, 비는 곧 가시는 것이었다.....”
소설에 따르면 이렇게 운다는데, 안타깝게도 황새는 소리 내어 울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황새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백로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백로는 그리 귀한 새는 아닙니다. 또 단 한 쌍만 외따로 번식하기보다는 여러 마리가 떼 지어 둥지를 트는 새입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백로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나아가 이범선 선생이 그 정도조차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학마을 사람들’의 ‘학’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작가 이범선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일종의 이미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이범선 선생에게 강의를 들은 적도 있어서 그분의 높은 인품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학처럼 꼿꼿하게 서서 삶과 문학과 세상을 조곤조곤 읊조리듯 말씀하시던 모습이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선생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이처럼 사소한 일에 소홀한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요? 일부러 찾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글을 읽다가 이렇게 어설픈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글쓴이와 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읽을 글을 쓸 때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꼼꼼이 따져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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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전교조신문(현 교육희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월간 <우리교육> 기자 및 출판부장(1990~1992), <교육희망> 교열부장(2001~2006) 등을 역임했다. 1989년 이후 민주언론운동협회가 주최하는 대학언론강좌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대학 학보사와 교지편집위, 한겨레문화센터, 다수 신문사 등에서 대학생, 기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육희망>, <우리교육>, <독서평설>, <빨간펜> 등에 우리말 바로쓰기, 글쓰기(논술) 강좌 등을 기고 또는 연재 중이다.
ccamya@hanmail.net [김효곤칼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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