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한 30일간의 유럽 여행]
2015.07.06 대한민국 서울
상해 서포대교徐浦大桥에서 서울의 인천대교仁川大桥로
갑작스러운 메르스 확산으로 애초 인천에서 출발하기로 한 일정을 취소하고, 상해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북경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차홍이는 2주 전에 내려와서 유럽 여행에 관해서 준비했었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우형이는 출발하기 이틀 전인 7월 4일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2년 만에 갖는 가족 간의 오붓함이었다. 차홍이는2012년 1월에 북경으로 유학을 갔고 우형이는 2014년 1월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 그간 우리 부부만 상해에 남아 있었다.
차홍이는 현재 칭화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있고, 우형이는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전체적인 유럽여행 일정은 7월 6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7일 인천을 거쳐서 런던에 도착하고, 29일 후인 8월 4일 상해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유럽여행을 계획하였다.
민항체육관을 옆으로 두고 외환고속도로를 타고 서포대교徐浦大桥를 막 건너는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려져 있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졌다. 다리 위의 서포대교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서포대교는 중국말로 쉬푸따차오라는 뜻으로 쉬徐는 한글로 서徐씨가 많은 지역을 뜻하며 포浦는 포구浦口의 의미하며‘따차오大桥’라는 말은 대교大橋라는 뜻이며 정확한 중국식 명칭은 ‘쉬푸따차오徐浦大桥’라고 표현하며 한글로는 서포대교로 이야기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별로 보지 않았던 서포대교의 이름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서포대교를 지탱해주는 중앙 기둥을 중심으로 앞, 뒤편에 원근법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바닥으로 뻗어있는 밧줄의 조형적선의 모습이 흡사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지는 조형적 선의 형태보다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대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푸동공항에 도착할 무렵에는 빗방울의 속도는 물론이고 소나기의 강도가 좀 더 세게 들려왔다. 혹시 오늘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나기도 하였다.
유럽여행의 시작은 이렇게 비를 맞으면서 시작하였다. 집에서 출발해서 민항체육관 근처의 사무실을 거처 외환선을 이용하여 서포대교를 거쳐서 푸동국제공항上海浦东国际机场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상해 푸동에서 인천 공항까지는 1시간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2시간이면 중국 상해에서 한국 인천으로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보니 평상시 보이지 않았던 한국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2007년 홍차오 공항과 김포 공항의 연계 운항이 시작되면서 2007년 이전에는 푸동 공항을 이용했으나 이후부터는 대부분 홍차오 공항을 이용했었기에 인천 공항의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서 접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항에 내려 이미그레이션Immigration에 도착하기까지 복도에 전시되어 있던 비주얼 소나무, 솟대, 얼굴 무늬 수막새, 양반탈, 각시탈, 부녀탈, 저고리, 한국의 장 문화, 한국 방문 포스터 등이 우리 가족을 포근하게 반겨 주었다.
또 하나, 이미그레이션에 못 미쳐서는 최근 중동 호흡기증후군 MERS 관련 발열, 기침,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있으면 신고해 달라는 홍보 피오피POP가 서울을 방문하는 인천 공항 내에 비치되어 있었다.
2003년에 중국 상해에서 사스를 경험한 터라 한국의 상황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장녀인 차홍이도 S 병원에서 2년 전에 무릎 수술을 해서 무릎 부분에 대한 검사를 받고 12월에 무릎 안에 넣은 물질을 빼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메르스의 영향으로 연기했다. 6월 말 한국에 들어와서 S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7월 초에 여행을 가려고 계획했던 것이 메르스 때문에 취소되었고, 한국 인천에서의 출발이 아니라 상해에서 출발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인천 공항을 빠져나와 인천대교를 건너는데 상해의 비 오는 날씨와는 정반대의 쾌청한 날씨였다. 역시 한국의 날씨가 좋다는 즐거움도 잠시, 우리를 인천의 차홍이 친구네 집에 가는 동안 택시 운사의 엄청난 과속에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인천 연수동까지 시속 160~180㎞로 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도 정상적인 도로 운행이 아니라 갓길을 이용한 소위 20년 전 총알택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운행 도중에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가셔도 된다고 했지만, 대답 없이 총알처럼 숙소에 도착하였다.
인천 공항에서 택시의 승차를 도와주신 안내원이 내게 준 택시 이용 시 고객 불만 신고서가 내 손에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무렵 신고서를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가져가세요” 하는 것이었다. “가져가서 불편하면 신고하셔도 됩니다.” 라는 말이 빈정대는 투로 들렸다. 가족 모두가 이러한 기사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차홍이, 우형이가 “아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녜요?”라고 했는데, 내일 런던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서 신고하기는 무리였다.
GDP 34,000달러(2014년)로 세계 22위인 대한민국,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일류 국가라 해도 무방한 나라인데, 20년 전에나 성행했던 총알택시가 2015년 7월 인천 국제공항에도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놀라웠다. 아이들 보기에도 한편으로 민망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외국 사람들이 처음 도착하는 국제공항인데, 의식 없는 운전사의 행동 하나가 국격을 얼마나 손실시키는지를 알기에 너무 서글펐다. 오히려 내가 국가를 대신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꼭 신고하고 싶었다. 다시는 그런 불친절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택시 기사의 생각은 그다음 날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인천 연수동의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연수동의 숙소는 차홍이의 친구 집이며, 이번 여행은 인천을 거쳐서 유럽으로 간다고 하니, 흔쾌히 집을 내주셨다. 무척 고마웠다. 차홍이 친구의 부모님께서 중국에 계셔서 비어 있는 집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여 런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빵점 아빠, 가족을 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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