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한 30일간의 유럽 여행]
2015.08.01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Colosseum,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티투스 개선문Arch of Titus을 보다
로마에서 둘째 날 우리는 콜로세움 근처의 유적을 여행하기로 했다. 콜로세움 근처의 티투스 개선문Arch of Titus은 기독교 디아스포라Diaspora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선문으로 유명하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은 250년 박해에서 벗어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313년)로 선언한 시기에 완성된 유적으로 유명하다. 최근 유럽의 테러 발생으로 인해서 프랑스는 물론 이곳 로마에도 유네스코 지정 유산(콜로세움)을 보기 위해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서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
영국의 역사가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를 높이 평가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인정한 것과는 달리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립하고, 과거 로마의 비잔티움Byzantium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로마 제국의 중심으로 세움으로써 정치적, 이념적으로 ‘새로운 로마’를 정립하여 로마의 역사가 사라진 이후에도 유럽의 문화 및 아시아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헬레나Saint Helena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막센티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와의 밀비오Ponte Milvio 전투(312)에서 승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수백년 동안 탄압받아 온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다음에 기독교의 탄압을 받는 역사적 사건도 있었으나 결국 서방 세계에 기독교를 알리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재로 볼 수 있다. 또한, 1700년대의 대규모 복구 작업과 1990년대 후반의 복구 작업으로 현재 유지되고 있는 로마 최고의 개선문이다.
티투스 개선문은 서기 81년 티투스가 사망한 직후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명에 따라 건설되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최고조에 달했던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일을 칭송하는 내용이 조각으로 꾸며져 있으며, 특히 기독교 디아스포라의 상징인 개선문으로 유명하다.
티투스가 재위 중인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Le Vésuve이 폭발하여 폼페이Pompeii 시가 땅속에 묻히기도 하였으며 수천 명이 사망하는 최대 참사가 일어났다. 80년에는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81년에는 페스트가 만연하여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을 수습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티투스는 로마의 재건과 구제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티투스에 의해 80년에 완성한 유물이 콜로세움이다.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 1세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에 세운 것이다. 보통 에투알 개선문으로 부르는데, 기본적인 형식은 큰 아치 하나로 된 단공식單拱式과 그 좌우에 작은 아치를 곁들인 삼공식三拱式 등이다. 현존現存 최고最古의 단공식 개선문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티투스 개선문인데, 1800년 만에 근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개선문이 바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글라디아토레劍鬪士의 시합과 맹수猛獸 연기演技 등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313년,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 200여 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고대 로마의 지배층은 물론 시민들에게 1차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곳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동서 로마의 분할과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의 멸망(1453)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나 대략 콜로세움은 완공 이후 최소 1000년 동안 왕권 강화와 지배층들의 놀이 문화를 담당했다. 중세에까지 남아 있었던 문화 현장을 가족과 함께 보게 되어 뜻 깊었다.
입구에는 많은 관광객이 줄을 서 있었으며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입구에서 시간을 보냈다. 1층의 동선을 따라 3층까지 올라왔는데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고통 속에서 죽은 수많은 검투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기원후 80년에 시작한 경기들은 시민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지배층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콜로세움은 때로는 로마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 때 보복을 거행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5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좌석은 계단식 방사상放射狀인 중앙의 한 점에서 사방으로 거미줄이나 바퀴살처럼 뻗어 나간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방사상의 배치는 검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기에 더없이 좋은 형태이다. 그러나 190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콜로세움 중앙의 검투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제 콜로세움은 유럽의 로마 시대 유산에서 벗어나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뛰어넘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해버린 로마 유적의 흔적과 그곳에서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기록과 기록되지 않는 세계적 문화의 흐름 속에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던 이곳 여행. 하지만 기쁨보다는 세계사적 인식과 특히 로마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한 부분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미리 공부하지 않고 이곳 로마의 유적을 관람하게 된 점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빵점 아빠, 가족을 품다>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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