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를 밝힌 여성들③
고야, 앵그르, 마네. 모두 다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이다. 이들이 함유하는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누드화다. 고야의 옷 벗은 마야,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그리고 마네의 올림피아는 모두 당대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소위 ‘문제작’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누드화인가? 나체라는 자극적인 소재라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을 팔짝 뛰게 만들었던 것은 화폭 안의 나녀(裸女)가 조롱하는 그들 자기 자신의 치부, 혹은 자기 기만에 대한 지각이었을 것이다.
판위량(潘玉良)의 굴곡진 생애
1895년 중국 양저우(扬州)에서 태어난 판위량은 여덟 살에 고아가 되었고, 열네 살에 그녀의 외삼촌에 의해 창기(娼妓)로 팔려간다. 종속적인 삶을 살던 그녀는 17세에 판잔화(潘赞化)를 만나 그의 첩이 되는데 판위량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1918년, 그녀를 상하이 미술 전문학교에 입학시킨다. 입학 후 미술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게 된 그녀는 누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사회적 관념에 반하는 것이었다.
곧 그녀는 파리와 로마 등에서 유학하며 서양화를 받아들이고 중국으로 돌아온 후 모교의 서양학과 주임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 후 1929년 개최된 제1회 전국 미전에 참가하여 중국 서양화가 부문 중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는 등 그녀의 예술은 탄탄대로를 걷는듯했다. 하지만 창기였던 과거는 계속 발목을 잡았고 누드화 전시에 대한 남편 판잔화의 반대 등으로 그녀는 1937년, 다시 프랑스로 떠난다.
프랑스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후 그녀는 지도활동을 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는데 곧 프랑스를 위시한 온 유럽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이러한 예술적 성과가 인정되어 프랑스 문화 교육 일급 훈장과 프랑스 예술 협회 격려상 등을 수상했지만 1960년 말 판잔화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의욕상실과 더불어 닥쳐온 건강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1977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작품세계
자포니슴의 발흥과 더불어 메리 케세트가 서양의 눈으로 해석한 동양의 미를 구현했다면 판위량은 동양의 눈으로 서양의 미를 구현했는데, 그녀의 수많은 누드화에서 서양 인상주의나 야수주의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누드화에 이리 많은 관심을 쏟았을까? 이는 바로 그녀가 자유를 갈망했기 때문이리라. 사회는 그녀를 창기로서 규정하려 했고, 이는 곧 속박으로 다가왔다. 이런 손가락질로 인하여 그녀는 모국을 떠났지만, 외국에서도 그녀는 ‘유색인’ ‘여자’란 색안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관념과 억압에 그녀는 초월적 도피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본연, 누드였다. 수많은 화폭에서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삶으로 회귀할 수 있었고, 통념과 관념으로 더럽혀진 현실에 대한 개탄, 비애, 또는 희망을 무명의 나녀들에게 부여했다.
직설적이기에 함유적이고, 함유적이기에 생동적인 그녀의 작품들은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예술에는 혼이 담겨야 한다고. 혼이란 무엇인가? 혼이란 육체의 초월이자 사회적 편견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자존(自尊)이다. 판위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의 혼과 자존적 표명인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모더니즘적 정신과 사회의 압제에 결코 복종하지 않겠다는 고귀한 투지를 향유할 수 있다. 초월이란 이런 것이다.
고등부 학생기자 강지우(CIS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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