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우리
D-3
나는 무용수다. 고요한 연습실, 엄지 발가락 하나로 지탱하고 선 내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연습을 그만둘 수는 없다. 이 공연을 위해서, 손끝 하나, 시선 하나, 표정 하나까지도 절대 놓칠 수 없다. 그만큼 나는 완벽한 무대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아직도 미숙하고 실수투성이다. 땀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내 발 놀림을 따라 곡선을 그려낸다. 자칫 미끄러워 넘어질 수도 있지만,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나는 연습실을 떠날 수가 없다.
공연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실감이 안 나는, 실감이 나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공연. 한반도의 모두 국민들이 평생 잊지 못할 무대. 그 무대에 내가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순간의 깨달음이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연습실의 공기는 뜨겁다 못해 축축하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백 번도 더 들어 악기만 다룰 줄 안다면 눈감고도 연주에 성공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노래가 첫머리로 접어든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든다. 그 날을 위해.
D-2
나는 기자다. 예민하면서도 흥겨운 업무 분위기는 며칠 째 적응이 안 된다. 모두들 ‘그 날’ 전에 혹시 무슨 큰 사건이 터질 지 예의주시하면서도 ‘그 날’만 떠올리면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하다. 피곤하다는 투정에서도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다는 것이, 수년간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 해온 나에게는 저절로 느껴진다.
이번 일의 보도를 맡은 나는 며칠 째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내 눈 밑의 다크써클은 내가 마시는 커피만큼 진한 빛을 띤 지 오래다. 어떠한 말로 서두를 장식해야 할 지, 마무리 멘트는 무엇이 적당할 지…. 이런 국가적인 행사의 보도는 처음인데다가, 이처럼 기념비적인 행사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어 부담감은 쌓여만 간다. 멘트를 조금이라도 준비해가고자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려놓지만, 올려놓은 손이 무안하게 머리 속은 텅 비어 사고회로가 정지된 지 오래다.
아니야, 안돼, 이러면 안되지. 남은 2일동안 나는 소풍 전 날의 학생처럼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그 날’의 보도에만 주력할 것이다. 그 날만큼 우리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큰 인상을 남기고,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 날이 내 인생에 한 번 더 있을까? 분명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물고 있던 커피 컵을 내려놓고 다시 모니터 화면에 주목하기로 한다.
D-1
“내일은 특별공휴일이니까 등교하지 않아도 되고, 되도록이면 집에서 tv로 생중계를 지켜보는 것이….”
나는 학생이다. 주변의 아이들은 내일 하루 논다는 소식에 정작 중요한 것은 까맣게 잊은 듯 하다. 이 소식이 이토록 반가운 것은 나뿐인 것일까? 사실 나도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를 들어가면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 줄 세우기 하고 있는 이것. 모든 신문의 1면은 물론 2면까지 차지하고 있는 이것.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이것. 근데 왜 내 주변에는 아무도 이 사실에 긴장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이 길이 내일부터는 완전히 다른 길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 내일부터는 또 다를 것이다.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내일부터는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신기하면서도 약간은 두렵다. 하지만 나는 내일 집에서 tv로 생중계를 시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생소한 느낌을 공유할 것이다. 함께 내가 제일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피부로 느낄 것이다.
D-DAY
축제 시작 전
목이 급격하게 타기 시작한다. 전날 몇 번이고 입어봤던 하늘하늘한 의상은 이제 와서 갑갑한 느낌이 온다. 심장이 뛸 때마다 온몸에 그 진동이 전해진다. 다른 무용수들도 상황은 피차일반인 듯 하다. 점점 늘어가는 사람들과 카메라의 수에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보지만 역부족이다. 나는 행여라도 동작을 잊어버릴까 쉴새 없이 연습을 하고 있다. 사실 모두들 약속한 듯이 계속해서 작은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비록 이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바람에 더욱 정신이 없지만, 연습은 계속된다.
마이크를 쥔 손이 애처롭게 떨린다. 곳곳에 걸려있는 현수막에는 강렬한 두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 두 글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할 틈조차 없이, 수많은 카메라들은 마치 나를 감시라도 하는 듯 내 앞에 줄지어 서있다. 몇몇 동료들의 도움까지 받아내며 가까스로 완성한 대본을 카메라맨의 손에 맡긴다. 주변은 벌써 시작 전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자들로 붐빈다. 3초, 2초, 1초….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저는….” 땀이 흥건한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내 멘트를 시작한다.
날씨가 마치 이 날을 축복하는 듯 환상적이다. 이미 시민들은 곳곳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대형 스크린을 주시한다. 상기된 기자들의 목소리가 역시 상기된 사람들의 말소리와 뒤섞인다. 나는 침착하게 이 모든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교과서에만 적혀있는 줄 알았던 그 두 글자.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그 두 글자. 온 국민의 기쁨과 희열, 환호를 담고 있는 두 글자가 실현되기까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아직 어리지만, 이 모든 것을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각오를 다지며 같이 온 친구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둘 다 농담에는 관심이 없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심은 온통 이 축제의 현장을 보여주는 스크린에 쏠려 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오늘, 한민족의 염원이었던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장내에 계신 모든 귀빈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 현장을 생중계로 시청하시는 국민 여러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이 경사를 함께 축하하고 기념하며….”
축제의 막이 올랐다. 한민족의 뜨거운 피를 끓게 하는 두 글자, ‘통일’.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제까지 분명히 존재했지만, 너무 오래 있었기에, 그 존재조차 당연시되어가던 그늘이 걷어지고, 따스한 햇살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린다. 슬픔의 눈물로 얼룩졌던 눈물은 기쁨의 눈물로 칠해지고, 가슴을 쥐어짜던 그리움은 반가움이 되어 마음을 끝도 없이 붕 뜨게 만든다.
나는 무용수다. 지금 이 시각, 나는 여전히 떨고 있으며,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내 손끝 하나하나에, 내 발끝 하나하나에, 내 모든 움직임에 화합의 기쁨을 담아 춤을 춘다. 펄럭이는 한복 소매와 부드럽게 흐르는 치마의 결들이 한반도의 통일을, ‘이 날’을, 축복한다. 모두 춤을 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서로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오던 통일, 그 통일을 담아내려 춤을 춘다. 얼굴을 씰룩이고, 다리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앉아있는 사람들도 춤을 춘다. 저마다 통일의 춤을 춘다. 나는 그들과 함께 흥을 나누는 무용수일뿐. 그러나 한낱 무용수이기에 더욱 열심히 춤을 춘다.
나는 기자다.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촬영되고, 기록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들 모두의 마음에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마이크를 잡은 내 손은 땀에 흠뻑 젖어있으며, 앞에 보이는 대본은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내 말에는, 단어에는, 문장에는 격한 감동으로부터 나와 전국민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큰 감격으로 나에게 화답한다. 모두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지도 모른 채 이 축제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위하여 보도한다. 나는, 통일의 순간을 위하여, 보도한다. 내 앞에 카메라도 어느새 감동의 물결에 흘러 들어 잔뜩 물먹은 장면을 송출한다.
나는 학생이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귀가 터질 것 같지만, 이 또한 내가 기억해야 할 상황임을 다시금 되새긴다. 통일 축제를 다같이 즐기기 위하여 우리는 다같이 길거리에 나와 다같이 행사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있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축제의 현장이 아닐까? 몇 주 전부터 남으로 이주한 새터민들 또한 이 곳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아랑곳 않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직 넘어가야 할 산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제일 큰 산을 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이 숨가쁜 역사를 제대로 느끼고픈 마음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광복 이후 겪어왔던 분단의 아픔, 그리움, 슬픔. 이 모든 것이 해소되는 이 순간, 이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하나를 이루었다. 그저 ‘그 날’이라고 추상적으로, 모호하게 규정지었던 우리의 특별한 날은 ‘그 날’이 아니라 ‘오늘’이 되었다. 이 오늘, 이 통일을 위해 우리 모두는 이제까지 달려왔고, 달리고 있으며, 또 달릴 것이다.
오늘은 참 좋은 통일의 날이다.
여지원(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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