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역시 무더운 8월이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달이 아닐 수 없다. 8월 15일 광복절이 어느 때와 다름없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 예를 들어 도산 안창호, 매헌 윤봉길, 백범 김구, 이봉창 등은 자신의 몸을, 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한민국의 독립에 힘썼다. 하지만 이렇게 무력으로 독립을 일궈내고자 한 인물만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대한민국엔 총과 칼 대신 종이와 펜으로 독립을 이끈 시인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상업적인 목적과 취미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닌, 민족의 밝은 앞날을 기리며 시를 작성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 시인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육사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며 호는 육사(陸史)이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었는데,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출옥한 뒤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공부 중에 루쉰(魯迅) 등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후 1930년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생애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1933년엔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서 데뷔했다. 또한 신문사 및 잡지사를 활보하며 시 외에 논문과 시나리오까지 손을 뻗쳤다.
그는 평생 옥살이만 총 17번을 겪으며 44편의 창작시를 남겼고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육사의 대표작이라고 여기는 <절정>은 그가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졸업 후 일제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비밀공작원이었던 그의 신분이 탄로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듬해 겨울 창작된 시이다. 이는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또 다른 대표작 <광야>는 그의 순국 이후 조국이 독립 만세를 외친 뒤에야 비로소 발표된 유작이었다. <광야>를 통해 이육사는 일제하의 절망적인 현실과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광명의 미래를 염원하는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윤동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그의 아명(아이 때의 이름)은 ‘해환(海煥)’으로 해처럼 밝게 빛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집안에서는 그가 의사가 되길 바랬지만 윤동주 본인이 글을 쓰는 것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유학을 통해 그의 꿈을 펼치고 싶었지만 그때 당시 창씨개명 없이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나가기는 힘들었다. 고민 끝에 창씨개명을 결심하지만 그는 매우 부끄러워했고, 이로 인한 고뇌와 아픔을 표현한 시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참회록>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별 헤는 밤>에서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등장하는데, 작 중엔 등장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동물들에게도 전부 이름이 있다. 하지만 8연의 한 부분인 ‘덮어 버린 자신의 이름’에서 윤동주가 창씨개명 이후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았지만 시는 잘 쓰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나의 고향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시를 쓰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또한 시는 왜 이렇게 쉽게 쓰이는가’라는 부끄러움을 <쉽게 쓰여진 시>라는 시에 녹여냈다. 그는 계속 고통에 시달리다가 1944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는데 그때 당시 윤동주의 가족이 “그가 이름 모를 주사를 계속 맞고 있다.”라며 그가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증언을 했다. 감옥살이 중 순국한 그는 그렇게 자신의 시집이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1945년 2월 광복까지 단 6개월 전 27세의 어린 나이로 순국하게 된다. 그는 짧은 일생 동안 끝없는 부끄러움과 참회 속에 살며 끝까지 ‘한글로 된 시’를 지켜내려 애썼다.
송몽규는 1917년 8월 28일에 만주 북간도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다. 윤동주의 친척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이고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라고 한다. 또한 필명으로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꿈별’이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졌다. 그는 1924년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연설을 하고 다녔고 윤동주와는 달리 비교적 다부진 성격으로 어른들 앞에서도 당당한 연설을 선보였다. 1932년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후 계속 글을 쓰던 송몽규는 2년 뒤 중학교 3학년 콩트 <숟가락>을 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게 된다. 1935년엔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기 위해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백범 김구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한 낙양군관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해 11월, 그는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해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1년 후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강제 귀국 후 고문과 취조를 받기도 했다.
이후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게 된 그는 <밤>이라는 시를 적어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윤동주가 속해있는 문예부 ‘문우’에서 부장으로서 활동하던 그는 부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하늘과 더불어>를 발표했다. 이는 그가 몸담았던 ‘문우’가 마지막을 맞아 아쉬웠던 그의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그는 1943년 7월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감됐던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함께 이송되어 옥살이를 하다 1945년 3월 7일 순국하게 된다.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너는 계속 시를 써라. 나는 총을 들 테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정도의 독립 운동을 시행했던 송몽규는 한때 윤동주가 열등감을 가졌을 만큼 뛰어났던 문학적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하였다. 2016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서 배우 박정민이 송몽규를 연기해 관심을 끌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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