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축이야기 ⑥ 예원(豫园)과 성황묘(城隍庙)
지금의 상하이 지역은 자연입지 조건상 상업과 어업이 발달하기 쉬운 지역으로 예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해 갔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해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상하이현을 둘러싼 성이 축조돼 있었고, 현성 내부의 지역에는 상하이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중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원(豫园)'
하지만 1559년에 만들기 시작해 18년 만인 1577년에 완공됐다. 완성됐을 때는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반윤단 본인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반윤단이 죽고 가문이 쇠퇴하면서 1760년까지 오랜 기간 방치되다가, 지역의 부호가 구매해 20년 동안 가꾸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편 전쟁때는 영국군, 태평천국의 난때는 황군, 상하이 사변시에는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훼손되는 등 안타까운 시기도 있었지만, 이후 1956년부터 5년에 걸쳐 보수되어 1961년에 일반에 개방됐다.
예원은 삼수당, 만화루, 점춘당, 회경루, 옥화당, 내원의 6개 구역으로 나뉜다.
‘삼수당’은 예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고 못을 사용하지 않고 만들었다고 한다. 삼수당에 들어가는 정면에 풍년을 기원하는 삼수당, 두 번째 주인이 쓴 영대경시, 세 번째 주인이 쓴 성시산림란 세 개의 편액이 차례대로 걸려 있다.
‘만화루’는 봄에 만송이의 꽃이 피는 것을 볼수 있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봄에 가면 좋은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점춘당’ 부근에는 경극의 무대가 되는 타창대, 쾌루가 세워져있는 바위산, 천운용장이라 불리는 55미터 길이의 용이 장식된 담장이 있다. 예전부터 용은 황제의 상징으로 개인이 사용하는것은 금지돼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되어 반윤단은 황제에게 불려갔는데, 황제의 상징인 용의 발톱은 5개이지만 예원의 짐승은 발톱이 3개인 이무기라고 변명해 반역죄를 면했다고 한다. 예원을 방문하게 되면 천운용장의 용이 가지고 있는 발톱의 개수와 용의 턱 아래에 침을 받아먹는 두꺼비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회경루’ 주변은 연못과 아름다운 모양의 돌과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옥화당‘은 반윤당의 서실로 사용됐던 건물인데, 앞에는 3.3미터 높이에 72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태호석을 볼수가 있다. 옥화당의 태호석은 강남 삼대 명석 중 하나라고 한다.
‘내원‘은 성황당의 부속 정원이었으나, 1956년 보수시에 예원의 일부로 들어오게 됐다. 그런 연유로 다른 부분과 다른 이미지를 가진 공간처럼 느껴진다.
상하이를 지켜주는 '성황묘城隍庙'
성황묘는 성황신을 모시는 도교 사원이다. 성황묘의 '성'은 성벽을 의미하며 '황'은 물없는 참호, 묘는 사당 의미하여, 도시를 보호하는 사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성황신은 당연히 그 도시를 지키는 신을 의미하는데, 상하이성황묘의 성황신은 진유백으로서 명태조 주원장이 아끼던 신하였던 진유백이 죽자 그를 상하이의 성황신으로 임명했다.
도시를 지키는 성황신은 황제가 임명했는데, 도시의 크기에 따라 품계가 나뉘었다. 황제가 있는 곳과 같은 큰 도시는 왕, 그 아래 규모인 부에는 공, 그보다 작은 주는 후, 그 아래 현은 백이라는 품계를 받았는데, 상하이는 현으로 상하이의 성황신은 백의 품계를 받았다. 지금의 상하이의 규모였다면 진유백의 품계도 높아졌을 것이다.
상하이 성황묘는 2006년부터 재건한 곳으로 총면적은 1000평방미터의 규모이다. 상하이 성황묘에는 성황신 이외에도 다른 신들을 여럿 모시고 있는데, 자항전에는 평안과 선박의 안전을 돌보는 자항진인을, 재신전에는 재물의 신 조공명을, 문창전에는 과거급제와 승진을 주관하는 문창진인을, 월하전은 결혼을 주관하는 월하노인을 모시고 있어, 부와 명예와 행복을 얻기를 기원하는 현대 상하이 사람들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학생기자 손제희(콩코디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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