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나는 냉면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가족들과 갈비를 먹는 특별한 기념일에도 마무리는 냉면으로 해야 개운하게 잘 먹은 느낌이었다. 식욕이 왕성했던 고등학생 때에는 고기는 고기대로, 냉면까지 두 그릇이나 먹었던 적도 있었다.
20대 중반의 푹푹 찌던 어느 여름날 이후 나의 냉면 사랑은 좀 더 깊어지고 전문적이 되었다. 마포에서 내 인생의 냉면을 영접했던 것이다. 늑장 부리다가는 몇 시간 줄을 서야 할거라는 친구 말을 듣고 12시 전에 도착을 했는데도 허름한 식당 앞에는 이미 몇 십 미터 줄이 늘어서 있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바삭한 녹두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으로 먹어 본 평양냉면은 그동안 내가 알던 냉면과 달랐다. 면발의 식감도 다르고, 식초 빠진 육수도 뭔가 심심했지만, 묘하게도 먹으면 먹을수록 구수하고 감칠 맛이 났다. 그 후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의 평양냉면 노포를 찾아 다녔다. 집집마다 맛은 조금씩 달랐지만, 평양냉면의 슴슴하고 밍숭밍숭함 끝에 ‘캬~’하는 육향의 깊은 맛은 중독성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함흥냉면이 세련되게 치장한 말끔한 느낌이라면, 평양냉면은 꾸밈없이 투박해도 알고 보면 몇 대를 거슬러 내려온 한정판 명품 같은 느낌이다.
여름과 겨울, 아이들 방학 때가 되어 한국에 갈 때마다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찾는 음식도 평양냉면이었다. 아이들은 그때마다 맛없는 냉면 먹으로 또 왔다고 투덜거렸다. 상해에는 다양한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지만 평양냉면을 하는 곳은 없다. 북한 식당에서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은 마시길. 같은 평양냉면이라도 옥류관 식 평양냉면과 북한 실향민에 의해 서울에서 맥을 이어오고 있는 평양냉면은 분단의 역사만큼 그 맛도 달라졌다. (그래서 요즘은 서울식 평양냉면이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북한의 평양냉면에는 면발에 식초를 아낌없이 뿌리지만, 서울식 평양냉면에 식초는 화들짝 놀랄 정도의 금기이다.
작년 여름에 이어 올 여름도 한국 방문이 어렵게 되니 나의 평양냉면 앓이가 더 심해졌다. 몇 곳의 한국식당에서 냉면을 먹은 후 그 실망감도 한 몫 했다. 결단을 내렸다. 내가 직접 만들어보겠노라는. 평소 요리 레시피는 귀찮아서 보지 않지만 냉면 육수를 위해서는 공부를 했다. 몇 가지 레시피를 찾아보니 공통점들을 발견했다. 소고기 사태와 양지머리로 기본육수를 내고 여기에 동치미 국물로 살짝 배합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의외로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어서 놀랍기까지 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냉면 좋아하는 가족들에게 합격. 용기를 내어 친구들을 초대해 집냉면 시식회도 열었다. 레시피 보고 더듬더듬 맛을 낸 초보자의 냉면이 얼마나 맛이 있겠냐만, 조미료 육수 냉면에 과감히 등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올 여름 내 인생의 혁명이었다.
냉면 육수를 내며 인간관계도 생각해본다. 달짝지근한 조미료 같은 얄팍한 관계도 있고, 밍숭한 듯 해도 뭉근하게 우러나는 진국 같은 관계도 있다. 평소에도 조미료에 과민반응이 있던 터라 평양냉면 한 그릇에 냉면으로서도 인간 관계로서도 가치와 의미를 담아본다. 선주후면(先酒後麵), 민짜, 거냉을 외치며 평양냉면 동호회라도 찾아봐야 할까 보다.
레몬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아줌마 이야기> 코너가 올해부터 <허스토리 in 상하이>로 바뀌었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들이 상하이 살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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