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비 오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축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매일 장맛비가 오다시피 하 고 대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숨을 쉬어도 왠지 시원찮고 속 답답한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루하루 일기예보를 검색하면서 며칠만 더 견디면 장마가 끝난다, 내 인내력을 시험한다. 그나마 기온은 견딜만한 이 우기가 끝나면 바로 그 날부터 무시무시한 염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여름이면 늘 텃밭을 가꾸는 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러 내가 좋아하는 취나물이며, 고구마순, 가지, 오이, 옥수수 같은 것들을 전해주고 갔다.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예쁘고 크지는 않았지만 향도 진하고 연해서 맛있었다. 동생 생각하는 언니 마음이 그렇기도 했다. 땀에 절고 흙 묻은 티셔츠와 바지에 모자를 아무렇게나 눌러 쓴 차림으로 차 트렁크를 뒤져 이것저것 챙겨 나에게 건넬 때, 조금 지쳐 보였지만 뭔가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언니 얼굴은 빛났다.
베란다에 화분과 영양 흙을 준비하고 오이, 토마토, 고추, 가지 모종을 심었다. 자급자족 하겠다는 야무진 욕심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잎이 달리고 키가 커가는 모종을 행복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남편을 불러 실컷 자랑하고는 이거 별 것 아니고만 교만을 떨었던 탓일까. 고단한 삶, 오이 잎에 하루 밤을 내려놓던 매미를 볼 때까지만 해도 느낌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은 시들시들 누렇게 되고 기운없이 축 처졌다. 고추, 가지가 심하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세상에, 잎 뒷면 반이 진딧물이다.
“얘들아, 기다려! 내가 너희를 구해 줄게!” 아침 저녁 물 줄 때마다 손으로 일일이 비벼서 진딧물을 잡아줬다. 손끝에서 수도 없이 툭툭 터지는 그 징그러움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누구 말대로 우유도 뿌려줘 보고, 구강청결제를 희석해서 뿌려도 보고 심지어 파리, 모기 잡는 에*킬러도 뿌려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이 점점 더 시들어만 갔다.
언니한테 자문을 구했다. 나의 깊은 시름이 무색하게 아주 쿨 한 답변이 돌아왔다. “약을 쳐야지, 특히 고추 같은 건 약 안치곤 안 돼”. ”더 깊은 화분으로 옮겨주고 흙을 넉넉히 덮어줘. 거름도 주고.”
뭐라고? 그럼 언니의 취나물도, 오이도, 고추도 백 퍼센트 유기농산물이 아니었다고? 근거 없는 나의 배신감을 누르며 살충제를 검색한다. 장바구니에 두고 한참 고민하다 결제를 클릭한다. 며칠 후 도착한 살충제, 왠지 독극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눈 딱 감고 뿌려준다. 칙! 칙! 백발백중, 다음 날 아침 죽은 진딧물이 바닥에 까맣게 떨어져있다. 단박에 잎들이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의 날 선 경고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이야기한 들 무엇 하랴, 사전에 더 공부하고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나의 무지함과 무심함을 아프게 탓한 들 또 무엇 하랴. 세상 일이라는 것이, 몇 그루 모종을 키워 열매를 거두는 일조차도 다 준비와 보살핌 그리고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 이렇게 배운다.
올 여름, 나의 삭막한 베란다를 푸르름과 희망으로 채워주었던 오이, 가지, 토마토, 고추 모종들은 아직 회복 중이다. 싱싱한 새 잎도 나왔고 흰색, 노란색, 보라색 꽃도 피워냈다. 하지만 모르겠다, 열매를 맺고 잘 키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내년에도 저 화분에 모종을 심으며 새로운 도전을 할 마음이 들지는.
하이디(everydaynew@hanmail.net)
<아줌마 이야기> 코너가 올해부터 <허스토리 in 상하이>로 바뀌었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들이 상하이 살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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