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옥 지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힘쓰며, 비행사의 꿈을 키운 그녀는 현재까지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
비행사의 꿈
권기옥 지사가 17세 되던 해인 1917년,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이 펼쳐졌다. 이 장소에 있었던 그녀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며 일본군의 전투기를 떠올리고, 처음으로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이 때 "비행사가 되어 일본으로 폭탄을 싣고 가리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비행인의 꿈과 독립운동가의 의지를 태우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3.1운동과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을 당시 수학선생님의 권고로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한다. 이후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 지사에게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전해 듣고, 권기옥 지사는 ‘송죽회’ 일원으로써 태극기 제작과 애국가 가사 등사를 맡는다. 3월 1일 다른 지사들과 함께 숭덕학교에 모이고, 곽건응 목사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을 필두로 거리에 뛰쳐나와 만세를 외친다. 며칠 후 이 일로 인해 형사에게 붙잡혀 유치장에 감금되지만 유치장에서 풀려난 후에도 그녀의 독립운동을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해 얻은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던 도중 평양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하던 김재덕으로부터 권총을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권기옥 지사는 무사히 권총을 전달해주지만 김재덕이 권총을 시험하는 도중 오발하여 소리를 낸다. 그 때문에 권기옥 지사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 받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낸다.
중국으로 망명, 일본 습격 계획 무산
1920년 평남 도경을 폭파하는 계획을 세우지만, 계획이 실패하고 난 후 일본의 감시망이 더욱 심해진다. 결국 권기옥 지사는 일본군을 피해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한다. 상하이에 정착하는 동안 비행사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그 끝에 1925년 항공 학교를 졸업하고, 비행탑승 적성검사에 합격해 조선 여성 최초 비행사가 된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항공 전투단을 이룰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기에 권기옥 지사는 중국 비행대에 들어간다.
중국 비행대 일원으로 비행 실력을 쌓으며 일본군에게 대적할 방법을 모색하던 때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1935년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의 부인에게로부터 청년들의 공군 입대를 위한 선정 비행을 할 것을 제안 받은 것이다. 이 때 권기옥 지사는 일본 본토를 습격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안타깝게 비행이 취소되며 계획이 무산으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권기옥 지사는 자신만의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임시정부와 해방 후의 활동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권기옥 지사는 충칭에 도착한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민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고,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한다. 또한 중국 공군의 한국인 비행사를 활용해 광복군 비행대 편성 및 구상을 돕는다. 광복이 된 후에도 국방위 전문 위원회로써 공군 창설의 3파 역할을 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남았다.
학생기자 강윤솔(상해중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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