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
빛이 비추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듯이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중에도 업적과 잘못이 너무나 강하게 대비돼 이렇다 평가하기에 어려운 인물들도 있다. 김활란 또한 대표적인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계몽운동과 인권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남긴 대한민국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뛰어난 교육인이자 사회운동가
김활란은 1899년 2월 27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학교에 입학하면서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우리에게 익숙한 '김활란'이 되었다.
그녀는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22년 웰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한다. 철학, 교육학, 웅변학 등을 공부했으며 학사, 석사는 물론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는다. 그녀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였는데 미국 유학 전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 황제가 사망하자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조선총독부의 단체 망곡 금지에도 불구하고 이화학당의 학생과 함께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했고 주모자로 잡혀 종로경찰서의 감옥에 갇힌다. 또한 근우회 창립 준비와 함께 창립 후 회장에 선출되기도 한다. 이 시기 그녀는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쓰며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0년대에는 덴마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 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의 경제 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쓰는 등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는 그녀의 친일행위가 본격화되기 전의 행보로 이후의 활동까지 생각하면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의 변절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가 심화되면서 1936년 이후부터 친일행위가 시작된다. 창씨개명은 물론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매일신문에 정신대 참여를 독려하는 글이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글을 수백 편 써 기사에 실었다.
그 중 도덕적으로 가장 강하게 비난을 받는 것이 학생들을 향한 정신대 독려였다. 여기서 정신대는 여자근로정신대를 뜻하는 것으로 ‘일본군위안부’와는 다른 것이다. 여자근로정신대는 미혼여성을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는 일종의 민간인 노동부대였다. 성착취는 없었지만 매우 열악한 근무조건에 노출돼 있었다. 그녀는 이런 정신대의 실상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못 배운 여성들은 물론 자신의 학생 또한 정신대로 보내는데 일조했다.
김활란은 여성계몽운동과 인권운동에 큰 공헌을 남겼던 탓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옹호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의 사과나 후회조차 표하지 않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녀의 동상이 있는 이화여대에서는 학생 주도의 동상 철거 촉구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역사의 특성상 김활란을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이런 양분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후대로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했던 모든 행위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생기자 김민서(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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