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1945년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 달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이 결실을 맺은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 “독립 운동”이라 하면 암살, 폭탄 투척과 같은 무력 투쟁이나 사회 운동 등 결과가 뚜렷하게 보이는 의거 활동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제에 맞서던 독립운동가들 역시 적지 않다. 시인 윤동주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 띄는 활동은 아니었지만, 일제에게 탄압받는 조국의 현실을 그린 수많은 시들을 통해 독립을 향한 민중의 소망을 표현했다.
북간도 문학소년의 꿈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드물게도 기독교를 주요 종교로 받아들인 지역들 중 하나였다. 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고, 기독교의 교리와 정신을 배워가게 됐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의 영향은 그의 시에 내포된 기독교적 이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윤동주는 8살 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는 공부를 잘하고 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잡지를 구독하거나 자신들이 쓴 글을 모아 <새 명동> 이라는 잡지를 직접 발간하기도 하는 등 글쓰기에 남다른 소질과 열망을 보였다. 하지만 윤동주의 희망적인 어린 시절 속에도 식민지배의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했다.
1931년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심화되며 북간도에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명동촌을 떠나 보다 안전한 도시 용정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또한 1936년에는 윤동주가 재학 중이던 숭실중학교의 교장이 일제의 신사 참배 명령을 거부한 탓에 파면을 당했고, 윤동주를 포함한 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단체로 자퇴를 한 사건도 있었다. 사건사고가 잦았던 시기였지만 윤동주가 시를 쓰고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서부터였다.
언어를 잃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며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님과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사촌 송몽규와 함께 본인이 희망하던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하게 된다. 훗날 연세대학교가 될 연희전문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고, 때문에 일본어로만 수업이 진행되는 등 일본의 규제에 따라야 했던 타 학교들과 달리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진행됐다. 윤동주는 한국어 강의를 들으며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자유와 상반되는 일제의 통제 속에 갇혀 있는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9년 11월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는 등 민족이 언어와 이름을 잃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윤동주의 가장 유명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이 시기에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한국어로 된 문학의 출판이 철저히 금지되던 당시 상황 때문에 출판이 무산됐다. 때문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그의 사후에 이르러서야 주변인들에 의해 세상에 공개됐다.
가장 사랑받는 시인, 독립운동가
1942년 3월, 조선 독립을 위해서 공부하려면 전문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1학기를 마친 후 다음 해 7월, 윤동주와 송몽규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방문할 준비를 하던 중, 조선인 학생을 모아 독립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를 당한다. 윤동주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살다가 해방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비록 무력이나 시위를 통한 통상적인 저항은 아니었지만, 자유와 희생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담은 윤동주의 시는 여전히 독립을 향한 정신을 담고 있다. 시인 윤동주는 한국의 문화가 침식되던 시기 속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학을 보존하고자 했고, 훗날 한국의 가장 사랑받는 문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거듭나게 됐다.
학생기자 윤재인(상해중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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