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내던져진 순간 짧은 울음으로 일성을 고한 뒤, 너는 분만실 한 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너의 눈동자 속에는 작은 별 두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30년 전 그렇게 우리는 처음 대면했다.
네가 처음 기기 시작하고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갈 무렵, 너는 구석에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줄을 잡아당기면 다리가 굴러가는 거북이 인형이었다. 바퀴가 고장 나 나사를 풀어놨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간 너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막 그 나사들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를 홱 젖혀 안고 입을 벌려 나사를 꺼내려 했지만, 눈앞에서 나사 네 개가 너의 작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아이를 젖혀 안을 게 아니라 엎어 놓은 채로 꺼냈어야 하는데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다니! 나는 너를 업고 미친 듯 병원으로 달려갔다. 엑스레이에 선명하게 찍힌 나사 네 개를 가리키며 의사는 나사가 그나마 끝이 뾰족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똥으로 나오기를 기다려 봐야 하지만, 아기의 소장은 가늘고 약해서 나사가 내려가며 손상을 줄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너의 기저귀를 맨손으로 헤집었다. 사흘째 되던 날, 기저귀에서 나사 네 개를 집어 올린 순간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왔다.
네가 처음 걸었던 날은 너의 첫돌 때였다. 좀처럼 걸을 생각을 하지 않던 네가 밥상에 기대어 커다란 족발 뼈를 양손으로 들고 무슨 맛인지 탐구하고 있었다. 식구들이 밥상을 살짝 빼냈다. 너는 처음으로 혼자 섰다는 것도 모른 채 족발 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너는 걷기 시작했다. 한 발 내딛고 균형 잡고, 다른 쪽 발을 내딛고 균형을 잡으며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걸었다. 너는 그렇게 처음으로 지구 표면 위에 너의 발자국을 찍었다.
[사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여인의 세 시기(The Three ages of Woman)']
너는 책을 거꾸로 놓고 읽곤 했다. 읽었다기 보다는 읊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책을 읽어줄 때 마주 보고 앉아서 귀를 기울이던 너는 거꾸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외워서 책을 곧잘 읊었다. 네가 처음으로 읽은 단어는 ‘우유’였다. 한 우유 대리점 간판 아래를 지날 때였다. 네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책은 <종알종알 말놀이 그림책>이었다. 우리말 음운이 어떻게 조합되어 있는지 패턴을 이해한 너는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한 권을 다 읽으면 내심 힘들었는지 네 작은 콧잔등엔 땀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지. 네가 처음으로 쓴 글자는 네 이름이었다. 너는 조형적으로 매우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체로 영역표시를 하듯 네 이름을 여기저기 커다랗게 써 놓았지. 그것도 지워지지 않는 유성 매직으로. 네가 처음 제목을 붙인 그림 기억나니? 검은 크레용으로 거칠고 날카롭게 그린 그 추상화의 제목은 “소금은 짜!”였다.
너의 동생을 병원에서 처음 집으로 데려왔을 때, 꼬무락거리는 작은 생명체를 들여다보며 너는 매우 신기해 했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달려가면, 너는 아기 머리맡에 앉아 말똥말똥 나를 올려다보며 아기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고 선선히 알려주었다. 또 무언가를 하다가 다급한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달려가면, 이번엔 자기가 아기 손가락을 앙 물었노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짐짓 엄한 얼굴로 야단을 치려다가도,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네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곤 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막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한 동생 엉덩이도 닦아주고 동생이 한글을 깨치도록 도와준 이는 너였다. 동생이 점차 덩치가 커지면서 너희 남매는 서로 아르릉거리며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성장하고 나서는 동생에게 엄마 아빠 보다도 더 합리적인 의논 상대가 되어준 이도 너였다.
네가 처음으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가파르게 경사가 진 높은 구조물 위에 올라서서 오랫동안 두려움과 맞서 싸우던 네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냥 포기하거나 무섭다고, 도와 달라고 해도 될 텐데 너는 처음으로 세상과 대면했을 때처럼 말없이 중력과 싸우고 있었다. 기다림과 조바심에 지친 내가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너는 바람처럼 달려 내려와 상기된 얼굴로 내 품에 와서 안겼지. 나는 아직도 그때 너의 고뇌와 갈등이 아프고 대견하다. 네가 그 구조물 위에서 바라본 하늘을, 공기의 흐름을, 심장의 두근거림을 엄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엄마라도 결코 대신할 수도, 대신해서도 안 되는 숭고한 순간이라는 것을 엄마는 두고두고 생각한다.
너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엄마도 모르는 새로운 길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먼 나라로 공부를 하러 혼자 떠났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회인이 되었다. 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너는 엄마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네가 맞닥뜨렸을 많은 일들과 관계들과 감정들을 엄마는 짐작만 할 뿐, 엄마는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을 엄마도 잘 알고 있다.
너는 이제 엄마가 되어 새로운 우주를 품에 안았구나. 네가 자라며 만났을 수많은 처음의 순간들은 엄마에게도 처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렴. 엄마는 너를 키우며 너와 함께 성장하고 철이 들었단다. 이제는 네가 네 아이의 수많은 처음들을 함께 하겠지? 어린 생명과 함께 맞이할 너의 처음들과 그걸 지켜볼 할머니로서의 수많은 처음들 역시 기쁘고 감사하게 맞이하려고 한다.
너의 모든 처음을 응원해.
그리고 사랑해.
김건영
-맞춤형 성장교육 <생각과 미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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