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그날그날 역사를 다룬다. 또한 ‘언론’은 단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에 지혜를 주며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언론의 역할 만큼 언론을 다루는 언론인의 역할도 중요하다. 우리나라 역사 속 언론은 어떤 역할을 했고, 각 시대별 언론인은 누가 있을까?
조선시대에도 언론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이 주로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했다. ‘간쟁’은 국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는 일을 뜻하고. ‘논박’은 국왕의 견해에 대해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일을 의미한다. 간쟁과 논박으로 조선시대 언론 역할을 했던 사간원은 오늘날 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간원이 지금의 신문사라면 사간원의 대사간, 사간, 헌납, 정언 등 관원인 ‘간관’은 오늘날 ‘언론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간관은 정부 관리일 뿐 오늘날 기자처럼 언론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언론인은 곧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정보 전달 수단으로 신문과 방송이 등장한다. 당시 언론인들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맞서 글을 썼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라고도 할 수 있다.
임정 독립신문 창간 기여 ‘조동호’
먼저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를 했고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동호는 상하이임시정부에서 4년간 활동했다. 당시 난징대를 졸업해 중국어에 능숙한 조동호는 중국계 신문인 상하이 <구국일보>와 <중화신보> 기자로 편집 업무를 맡기도 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 29명 중 한 명인 조동호는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창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최초 순직기자 ‘장덕준’
동포 학살 참극을 알리려다가 일제에 암살당한 순직 기자인 추송 장덕준 선생도 일제강점기 언론인 중 한 명이다. 1920년 10월 만주 훈춘에서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게 패한 보복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발생했다. 장덕준은 간도 현장으로 달려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했다. 취재 도중, 일본군에게 불려 나갔고 그 후로 소식이 끊겨 한국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됐다.
최초 여기자 ‘이각경’
당시 유일한 한국어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해 여기자를 모집했다. ‘매일신보’는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사회를 위하야 건전한 붓을 휘두를 그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이각경의 입사를 알렸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최초 여기자가 탄생했다. 1921년 1월 1일에는 ‘본사기자 이각경 여사’라고 이름을 크게 밝혀 “신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 가정 주부께”라는 장문 논설을 실을 만큼 이각경은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후반부터는 게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기자생활은 길지 않았다.
한국 최초 퓰리처상 수상 사진기자
‘2019 퓰리처상 브레이킹 뉴스’ 부문 수상,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
21세기 현대 사회는 글보다는 사진과 영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식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 문학, 음악상인 ‘퓰리처상’을 우리나라 최초로 받은 사람은 김경훈 사진기자다.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는 2019년 11월 25일 미국과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에서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온두라스 여성이 두 딸의 손을 잡고 최루탄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사진, 퓰리처상 이사회는 김경훈 사진기자가 속해있는 로이터통신 사진팀을 ‘2019 퓰리처상 브레이킹 뉴스’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거친 사람들이 오고 있다. 그리고 갱단들이 오고 있다’고 말하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5000명이 넘는 미군 군대를 국경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는 갱단의 모습이 아닌 기저귀와 엘사 티셔츠를 입은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 이 사진은 미국을 뒤흔들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학생기자 장인우(상해한국학교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