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는 학생들을 어리다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회에서 배제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요즘 청소년들은 정치와 사회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학생시위는 아주 중요하고 큰 영향이 있었다. 장기집권이나 독재정치 저지에 대한 시발점은 항상 학생운동이 시작과 구심점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학생시위를 통해 지켜지고 발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월 3일 학생의 날’ 광주학생운동 기념 지정
1929년 11월 3일은 일제의 억압에 항거해 광주를 비롯한 전국의 학생과 청년들이 조국광복을 부르짖고 나섰던 날이다. 항일 학생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1953년 10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정부기념일로 제정됐다. 이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인 3.1운동 다음가는 대규모 학생운동으로서 전국에서 194개교 6만여 학생들이 이 항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대구 학생시위 2.28
1960년 3월 15일 야당 대구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모든 초중고, 학생들을 강제 등교 시킨 사건으로 야당의 선거 유세를 간접적으로 방해하고 선거 연설을 들을 수 있는 권리를 차단하는 행위였다. 이에 고등학생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로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살리자는 구호로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학생들을 강제 등교 시켜 의미없이 봤던 영화를 계속 관람하거나 토끼 사냥을 강제로 시켰다. 왜 굳이 투표권도 없는 학생들을 유세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을까? 당시 고등학생들이 미국에서 도입된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가진 세대였다. 학생들이 야당의 유세장으로 가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김주열 고등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전국으로 퍼져나가 후에 부마 항쟁 4.19등 민주 운동의 시발이 점이 됐다.
5.18 민주화 운동
1961년~1979년 박정희 군사정권 붕괴 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하나회)이 국가권력을 탈취해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 노동3권보장”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했다.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를 위한 거리 시위가 시작됐고 시위가 거세어 지자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차단하고 고립시켜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계엄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로 인해 무수히 많은 시민 희생자가 발생했고 광주 전남지역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이후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됐다.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민주화 운동 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6월 항쟁, 6월 민주화 운동, 6.10항쟁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현행 5공화국 헌법대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열망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이끌어 냈다.
6월 10일부터 6월 29일 대략 20일간 이어진 6월 민주 항쟁은 박종철,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찰이 10시간 동안 물 고문 끝 사망. 하지만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정부의 말도 안되는 해명으로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시위를 하게 되는데, 시위 중 이한열이 직격 최루탄을 맞고 최루탄 탄피가 머리에 박혀 피를 흘리고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시위는 학생 중심에서 국민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접 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되거나 연금된 정치인사들의 석당 등으로 내용으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게 됐다. 이에 따라 헌법이 개정됐고 국민들은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학생기자 이윤중(SUI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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