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 유신독재 반대 시위 사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빠르게 변해가며 현대인들의 삶이 바빠지는 요즘, 사람들은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을 만든 민주화 운동들을 잊고 살아간다. 43년 전 10월, 1979년 10월 16일에 일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를 반대한 시위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사건 중 하나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4대 민주화 운동 중 하나다.
유신 체제란 무엇인가?
부마민주항쟁 발단 배경에는 유신체제가 있다. 유신 체제는 경제 불황으로 인한 고조된 국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독재 정책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존의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고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체제를 설립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국민들은 대통령을 투표할 권리조차 박탈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1/3을 뽑을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 또한 가졌다.
부마 민주항쟁 사건의 발단
국민들은 3대 주권인 투표(投票)권 저항(抵抗)권 혁명(革命)권이 박탈되자 1978년 야당의 득표율이 증가했고 정권의 불안정함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의 총재 김영삼을 제명하자 시위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결국, 10월 16일 저녁 “서슬 퍼런 독재의 칼바람에 정면으로 맞서” 소수 학생의 외침으로 시작한 이 시위는 훗날 부마 민주 항쟁으로 불리는 4일간에 과격한 시위로 불거졌다.
“독재 타도 유신철폐 물러가라!”
한때 고요했던 광장은 함성으로 뒤덮였다. 5만 명 정도의 나이 불문 시민들이 부산에서 이 구호를 외치고 단체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8일 0시 부산 전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나 시민들을 구타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시작한 부마 민주 항쟁은 산불처럼 마산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고 부산과 마산 전 지역에 “독재 타도 유신철폐”라는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소수의 학생과 시민들의 외침으로 시작한 부마민주항쟁은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박정희 총살로 인하여 끝나게 된다.
부마 민주항쟁의 결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제40주년 부마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마 민주항쟁을 “가장 길고, 엄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유신 독재를 무너뜨림으로써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이라고 표현했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살로 끝나며 대한민국은 자유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 항쟁이었던 부마민주항쟁은 비록 부산과 마산에서만 일어났던 시민 항쟁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자유의 상징이고 이듬해 일어난 5월 18일 혁명과 1987년에 일어난 6월 10일 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출처 부마 민주항쟁 기념재단)
결론
부마민주항쟁은 투표할 자유, 표현할 자유, 사회의 부정당한 부분이 있으면 혁명을 일으켜 바꿀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원동력이 됐고 시발점이 됐다. 역사를 잊은 자들에게는 미래가 없듯이 부마민주항쟁에 동참해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분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생기자 문시훈(상해중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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