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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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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다시 집어 든 박준의 시집이 오랜만에 읽어도 새삼 너무 좋았기에 어딘가의 누군가가 이 시집을 읽는 감동을 함께 느꼈으면 한다.
시는 축약되고 절제된 언어로 세상과 사람을 말한다. 시집 말미에 고( 故) 허수경 시인이 ‘덧붙이는 글’에서 “나는 다른 시인의 시들을 해석할 수 없다. 다만 읽고 느낄 수만 있다.”고 했듯이 이 소개 글 역시 해석은 삼가고 시집 속 내 마음을 흔들었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한 발 더 나아가며/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우리에게도 있었다
- '마음 한철' 중에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별보다 많은 눈동자들이 어두운 방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나는 내 창에 골목에서 만난 눈동자를 잘도 그려 넣었다
- '잠들지 않는 숲' 중에서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 '당신이라는 세상' 중에서
박준은 ‘울보 시인’으로 불린다. 몇 년 전, “트럭 몰던 아버지의 감수성, 아들 박준의 시로 피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단숨에 읽으면서 심금을 울리는 시인의 글귀가 어떻게 온 것인지 넘겨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인은 ‘당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슬픔을 놓고 같이 슬퍼하는, 잘 우시는’ 아버지로부터 ’연민’과 ‘공감’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2017년 ‘젊은 예술가상’을 받으면서 시인은 “울지 말란 말,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시인은 2008년 등단했고 시집 한 페이지에 뒷모습이 등장한 그의 누이는 그해 하늘나라로 갔다. 시마다 스며있는 애잔함과 슬픔과 또 그것을 감싸 안는 따뜻함은 자신과 주변인의 삶 구석구석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애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시집에 수록된 60여 수의 시에는 이외에도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 참 많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환절기'), “나에게 뜨거운 물을/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좋은 시는 삶과 크게 괴리되지 않는 작품”이라는 시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귀들이다.
시인의 다른 작품으로는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17)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출판된 지 십 년이 넘은 이 첫 시집이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몇 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라 나 혼자만 알 리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여기저기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요즘 상하이 날씨 참 좋다. 박준 시인은 '낙서'라는 시에서 말한다.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자, 그 봄날의 눈빛으로 이제 박준을 읽을 차례다.
최승희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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