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축이야기 ② 후통(胡同)과 쓰허위안(四合院)
상하이에 롱탕(弄堂)과 스쿠먼(石库门)이 있다면, 베이징에는 후통(胡同)과 쓰허위안(四合院)이 있다.
후통(胡同)의 기원
베이징은 중국의 통일 왕조인 원, 명, 청나라의 도읍지였다. 베이징의 후통은 원나라의 건국 시기인 800년 전부터 생겨났다.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면서 큰 대로를 닦고 각각의 대로를 연결하는 작은 골목길도 만들었다. 이 때 곧게 만들어진 수 많은 골목길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후통의 기원이다.
후통이라는 용어는 원래 몽골의 우물을 의미하는 ‘Xuttuk’의 음역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생활에 필요한 우물을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는 점과 몽골족이 새운 원나라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직계 가족만이 자금성에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직계가 아닌 형제와 자매들은 자금성 근처의 후통에 자금성 보다 작은 궁궐인 왕푸를 지어 살았고, 황족이 아닌 고관들은 왕푸 바깥쪽 후통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쓰허위안(四合院)
쓰허위안은 중국 화북지방의 전통 가옥 건축양식이다. 베이징 후통에 접한 여러 쓰허위안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유명하다. 쓰허위안은 중간의 정원과 뜰을 중심으로 북쪽 건물인 정방과 맞은편의 도좌방, 그리고 양쪽으로 동서상방의 말 그대로 ‘네 개’의 방이 ‘합쳐진’ 구조의 전통 양식이다. 중간의 정원은 많게는 세 개까지 있다고 한다.
쓰허위안의 배치 방식은 중국 고대의 예법을 따라 공간이 구성되고 분배된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정방은 중심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좌우에 조부모와 부모가 거주했다고 한다. 동서상방에는 아들들이 거주하는데, 홀수인 첫째와 셋째는 동쪽에, 짝수인 둘째와 넷째는 서쪽에 거주했다고 한다. 도좌방은 남옥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좌방의 중간에는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이 있다.
쓰허위안의 대문은 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가장 등급이 높은 광량대문부터 금주대문, 만자문, 여의문, 착대문, 소문루 순으로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 수 있는 대문이 달라, 대문만으로 집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후통에서 만나는 한국의 역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역사는 상하이임시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하이임시정부에 비판적인 독립 운동가들은 베이징에 모여 활동했다. 당시 베이징은 상하이보다 일본의 견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교통의 중심지로 신사상과 문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특히 베이징 지역의 독립운동가 들은 1920년대 베이징에서 유행한 신사조인 아나키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노선에 반발해 베이징으로 옮겨와 의열단 등의 무장단체를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지하철 푸청먼역 부근에 있는 진스팡제 후통은 1920년 단재 신채호 선생이 부인인 박자혜 여사와 신혼생활을 하던 곳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신채호 선생도 그렇지만 부인이신 박자혜 여사도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두 분은 진스팡제 후통에서 사시다가 다음해 차오더우 후통으로 옮겨 큰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가 이 부부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시절로, 이후 신채호 선생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박자혜 여사는 한국에서 쓸쓸히 병사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일가족 전체가 독립운동가로서 유명하다. 조선의 대부호 집안의 여섯 형제가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6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상하이임시정부와 결별한 이회영 선생은 난뤄구샹의 한 후통인 허우구러우위안 후통에 자리를 잡았는데, 언제나 수십명의 독립운동가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후 베이징에서 살던 6년 9개월 동안 경제적 문제로 여러 번 집을 줄여 이사를 했고 마지막에는 난뤄구샹 서쪽의 마오얼 후통에서 살았는데, 허름한 쪽방이었다고 한다. 대부호의 자식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신 위대한 삶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처럼 베이징 후통 곳곳에는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추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학생기자 손제희(콩코디아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