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
한국의 근대 문학,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춘원 이광수이다. <무정>, <흙>등의 대표작은 아직까지도 명작이라고 꼽히며,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광수는 한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할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명망 있는 문인이었지만, 후에 완전히 친일파로 전향해 한국 문학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천재 문인의 탄생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몰락한 양반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광수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이때 이광수는 고아가 되어 누이동생 둘과 외가에서 자랐는데, 곧 동학에 입교하여 서기가 되었다. 동학이 해체된 이후 1904년에 상경한 그는 친일파 관료인 송병준의 눈에 들어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다이세중학을 거쳐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게 되는데, 이때 메이지학원 동창회보에 일본어로 집필한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0년에 이광수는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한데 이어, 평론 <문학의 가치>를 발표했다.
이 때 이광수는 일제의 회유로 잠시 귀국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7년 이광수는 최초의 장편 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 신보에 연재하였는데,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이 1만부가 팔리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였다. 당시 인구와 문맹률을 고려하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다 본 수준의 베스트 셀러였다. <무정>이 크게 성공하면서 이광수는 문인으로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는데, 당시 육남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혔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는 등 이광수는 민족의 대표 문학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춘원의 충격적 전향
하지만 민족의 대표 문인으로서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1년 임시정부 동지들의 만류에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다. <민족개조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조선인의 부속적 성격에는 문제점이 많으니, 이를 필히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개인 단위에서 인격적 각성을 하는 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다. 이광수는 조선인들이 이러한 각성을 하지 않으면 쇠퇴밖에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망언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광수의 전향은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1939년 이광수는 친일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아 창씨개명을 한 뒤 전국을 돌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참전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이광수가 <신시대>에 기고한 <선전대조>라는 시를 보면 이광수의 친일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소 충격적인데, 몇몇 구절을 빌려보자면: ‘하와이 진주만에 적악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민족이 번영할 기업..앵글의 발에 더럽힌 지 2백년, 우리 임금(천황) 이제 광복을 선하시다.’ 이를 통해 이광수의 친일이 단순히 생존을 위한 친일이었다기 보다는 광신적 친일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이광수의 행보
해방 이후, 이광수는 봉선사에 은거하는 등 숨어 사는 신세가 됐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체포자 제 2호로 연행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곧 풀려났다. 이 때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이 참 개탄스러운데,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고 주장하였다. 해방 이후로 폐결핵에 시달린 그는, 한국전쟁 당시 유명세로 조선인민군에게 북한으로 끌려갔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병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인민군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운명했다. 2003년에 북한에 재북인사릉이 조성되었는데, 이때 이광수도 이장되어 현재 무덤은 재북인사릉에 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광수의 행보가 우리들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이광수는 분명히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친일 행적과 떼어놓고 보면, <무정>이나 <단종애사>같은 그의 작품들은 분명히 문학사적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인이 우리 민족성을 누구보다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민족의 성격을 지적하면서 민족의 자제들에게 참전을 촉구한 것은 분노를 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프고 슬프다. 또한 우리는 그가 친일 행적에 대해 한 변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일제에 빌붙은 것이 ‘민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죽어간 그의 과거 임시정부 동지들은 그의 기억 속에 있지 않은 걸까.
학생기자 전시우(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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