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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한길사 | 2006.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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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 시대에 유대인을 가스실로 실어 보내는 일을 하던 행정 공무원이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일에 가담한 그는 악마의 모습으로 괴물 같이 살았을까? 패전 후 15년을 도망 다닌 아이히만은 비밀경찰에 체포가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책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치사상가로서 활동했던 한나 아렌트의 시선으로 재판 과정을 담아낸 보고서다.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된 아이히만은 상부의 지시를 성실하게 따랐을 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65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범의 입에서 나온 증언에 모두 경악한다. (그는 멀리 가스실까지 보내는 수송비를 아끼기 위해 아예 기차에 가스실을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곧바로 정신과 전문의, 성직자에 의해 정신감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모두를 당황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아이히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기는커녕, 성실하고 평범한 아버지일 뿐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을 모두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본인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며, 그에게 세 가지 무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다. 아이히만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 못했다. 차라리 악인의 형상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이 평범함이 더 무섭지 않은가?
직장 내에서도 가끔 비슷한 사람들이 목격된다. 직장 문화는 일부 군대 같은 복종의 체계로 작동한다. 권력자인 최고 책임자가 시키면 중간 관리자들은 그대로 실행한다. 처리 과정에 비합리적인 사안이나 누군가 받는 고통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런 관리자의 모습은 어찌 그리 아이히만과 똑같은지. 생각과 판단 기능을 상실한 아이히만처럼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당당히 면피한다. 공감도 양심도 없다. 지성과 판단 능력의 부재는 어쩌면 나쁜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일 것이다.
나에게 의문점이었던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나치스 아이히만, 그리고 조직 내 끔찍한 관리자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으로 내 머릿속에 모두 정리되었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는 더 두렵다. 악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고,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상상을 초월하여 악해질 수 있으며 저자의 말대로 ‘특별히 천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딸아이는 한나 아렌트의 책 여러 권을 읽은 듯하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자주 소개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잘 닦여진 길을 걸으며 공부만 하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조직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칫 아이히만처럼 상부의 지시만 따르고 사유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난 뒤 딸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어른이라고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아. 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지, 무조건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야.’ 이 말은 자식을 지키고 싶은 부모의 현실 조언이기도 했고, 순종에 대한 미덕을 교육받고 자란 사람으로서 한 번도 부정해 본 적 없는 진실에 대해 스스로 묻는 각성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상황에 따라서는 나도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최인옥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