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주도에서 벌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이다. 이 끔찍했던 살상의 현장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죽거나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은폐되거나 왜곡됐던 진실이 199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부차원에서의 진상조사와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가 이뤄졌다. 4월을 맞이해 한때 잊혀질 뻔했던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 현대사의 얼룩진 흔적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4.3의 진행
1947년 3월 1일 제주도, 3.1절 기념행사에서 구경꾼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항의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했고,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결집해 3.10총파업을 감행하게 된다. 이후 1년 여 넘는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주민, 경찰관 충돌과 진압 사건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남조선로동당 제주지부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단체의 거점을 기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뒤를 이어 이들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 민간 무장단체가 투입됐고, 무장대뿐만 아니라 무고한 제주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이 이뤄졌다. 결국 4.3은 남조선로동당 무장대와 국군, 경찰, 극우 폭력단체 연합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4.3의 책임
제주4.3은 표면적으로는 제주도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들과 경찰, 군인, 그리고 우익 폭력집단인 서북청년단의 무력 충돌이 그 본질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을 좀 더 들여다 보면, 민간인 무력 진압을 방관하면서 사태를 더 악화시킨 그 당시 정부와 미군정의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3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노력
오랜 세월 제주4.3의 희생자 유가족들과 피해 당사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오해 속에서 그날의 억울함과 고통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살아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진상 조사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받아들여졌고, 계속된 노력 끝에 2000년 1월 12일 마침내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를 통해 신고, 확인된 희생자 수만 해도 1만명 이상에 달했는데, 미신고 혹은 미확인 사망자를 따지면 실제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유가족들과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또한 그에 따른 공동체적 보상으로 2008년 ‘4.3평화공원’이 개관했고,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4.3 피해자 보상 문제
이러한 정부 차원의 4.3 관련자 명예회복과는 달리,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금전적이거나 인도주의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빠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정부는 제주4.3의 희생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공개했다. 4.3 특별법 제2조에 따라 사망자와 후유 장애인을 포함한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9000만 원 이하의 보상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족들과 무고한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과 피해를 금전적인 보상으로만 가늠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거울삼아 어떻게 대처해야 앞으로도 되풀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대처할 수 있을까?
첫째, 금전적인 보상보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을 우선시해야 한다.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는 물론이고, 후손들이 이 역사적 사건을 알고 배울 수 있도록 기록해 놔야 한다. 제주4.3은 인도주의적인 지원과 보상이 잘 이뤄지지 않았던 사건 중 하나라고도 알려져 있다. 제주4.3의 피해자들은 50년 이상 공식 사과문과 추념식을 받지 못했다. 어떠한 사건이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정부와 피의자들의 형식적 사과가 아닌 진심 어린 사과와 추모는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둘째, 보상금에 대한 공정성과 형평성에 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보상금 지급 문제에 있어서 공정성이 무너진다면 더 큰 갈등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보다 더 조사하고 피해상황을 알아내야 조금이라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가능한 빠르게 진상 규명을 해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이 불명예를 입지 않도록 해야한다. 제주4.3의 경우,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50여 년 세월 동안 반정부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 여러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숨죽인 채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2000년 1월 12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요청으로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은 제정됐지만, 50여 년의 세월 동안 고통을 받으며 살아 왔던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피해는 가늠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4.3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 현대사의 뼈아픈 부분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에는 이와 같은 폭압과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만행은 반드시 없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제주4.3을 과거의 잘못된 역사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적절한 보상 방안을 계속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를 두 번 죽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건 사후 처리의 논란들은 피해자들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샅샅이 밝혀 잘못을 정리함으로써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4.3 평화공원 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설명판에 적힌 글귀)
학생기자 서지호(상해중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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