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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 서해문집 | 2016.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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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전업주부에서 스타 작가로 변신한 은유 작가의 산문집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밑줄을 박박 치고 싶은 좋은 문장들이 넘쳐나지만 이번에 다시 펼쳐 들고 보니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유난히 더 눈길이 갔다. 아마 얼마 전 ‘공감’ 사람들과 <젠더와 사회>라는 책을 함께 읽으며 젠더감수성이 조금 일깨워져서일 것이다.
우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표지 제목의 글에는 서른을 갓 넘긴 미혼 후배가 직접 경험했다는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즉 한번은 후배가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 맛있게 냠냠 먹고 있는데 직원이 그러더란다. “고객님 남편 안주용이나 아이들 간식으로 좋아요.” 순간 당황하고 불쾌하여 “제가 먹을 건데요!”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이 에피소드에 대해 은유는 “얼굴에 앳된 기색 사라지고 나면 한 여자의 개체성은 상실되고 엄마나 어머니로 호명되는 경우가 많다. 욕망의 주체가 아닌 돌봄 노동의 대명사로 불린다.”며 문제를 제기한다.
이 산문집에는 은유 작가 본인이 겪고 듣고 관찰한 이런 에피소드들이 넘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에피소드들을 기반으로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다. 깊이 공감했던 몇 대목을 공유한다.
◎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 같지 않다. 그냥 밥순이, 그냥 아줌마다.
◎ 안쓰러운 어린것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인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말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불현듯 얼마 전 근 2년 간 얼굴을 못 본 동창생과의 통화가 떠오른다. 아이들의 공부에서 시작해서 남편, 친정부모에서 시부모까지 안부를 주고받으며 1시간 넘게 폭풍수다를 떨었는데 정작 그 속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얘기는 한 토막도 없었다. 중국이라는 땅에 살아서인지 특별히 가부장제의 피해를 못 느끼고 살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건 어쩌면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자위일 뿐일지도 모른다. 간만에 외출을 해서도 가족의 밥 걱정을 하고 귀갓길에는 어깨가 지끈거릴 정도로 장바구니를 메고 지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돌봄 노동을 자처하는 나 또한 분명 가부장제의 언어를 내면화하고 일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확인했다.
알게 모르게 내 몸에 덕지덕지 입혀진 가부장제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은 누구보다도 먼저 스스로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싸울 때마다 조금씩 더 투명해지고, 투명해질수록 좀 더 온전한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 만만치 않을 몸싸움을 위한 링 위에 자신을 세워본다.
류 란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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