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때부터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현실에 먼저 관심을 갖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심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어느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찾아 다니며 보는 것이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일이었고, 그렇게 나의 시야도 넓어졌다.
얼마 전부터 다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보게 된 한 편을 통해 옛 취미와 그때의 꿈이 오버랩되어 되살아났다. 잘 만들어진, 투박하더라도 진솔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주는 감동, 힐링의 매력을 참 오래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이제 슬슬 실례하겠습니다.
세일즈맨은 물러날 시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 엔딩노트(2011, 감독 스나다 마미) 中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일에는 누구보다 꼼꼼하게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는 그, 다웠다. 스나다 도모야끼, 평생 화학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그는 말기암 진단을 받고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업무와 접대로 평생을 회사에 바친 그는 정년 퇴직 후, 아내와 제 2의 삶을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다. 절망도 잠시, 그는 계획적이고 깔끔한 성격답게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담담히 정리해 나간다. “제 삶을 스스로 정리하지 않으면 남은 가족들이 곤란해질 테니까요.” 엔딩 노트가 시작된 이유이다.
“더 많이 사랑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 주기,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장례식장 사전 답사 하기,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등, 그는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하나씩 완수해나간다. 이 모든 과정을 막내딸이자 이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미 스나다가 기록을 해 나가고, 나레이션까지 맡았다.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가 예상되지만, 다큐멘터리는 의외로 유쾌하다. 막내 딸의 발랄한 센스가 돋보이는 나레이션과 스나다 도모야끼의 유머러스한 농담들로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예정된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면서도 농담을 하고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인생 내공이리라.
하지만, 결국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차곡차곡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알려주고, 마지막까지 재치있는 멋진 작별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에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여름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이 다큐멘터리를 양가 부모님께도 보여드릴 생각이다. 이제는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을 스나다 도모야끼씨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손주들을 끔찍하게 사랑하시니, 내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공감과 애환을 느끼시지 않을까. 우리 부모님들의 엔딩노트가 궁금한 속내도 굳이 감추진 않겠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서 정말 행복했단다. 하늘의 별이 되어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레몬 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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