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계절이다. 꽃샘 추위가 물러난 후 따뜻함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4월은 화려한 봄의 시작을 알린다.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4월은 추위를 견딘 후 쟁취한 시대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럼 대한민국 역사에서 4월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 속으로 떠나보자.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몇 천년 동안 이어져 온 전제군주제의 끝이자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퍼진 3.1 만세운동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뒤에 3.1 만세운동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7,000명의 사망자와 45,000명의 부상자를 비롯한 온 국민의 희생을 있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의 피와 땀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비로서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탄생했다. 안창호 선생이 정의한 민주공화국은 ‘한 명의 황제가 아닌 2000만 국민 모두가 황제인 나라’라고 했다. 이렇게 4월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이자 많은 희생을 통해 쟁취한 값진 결과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국가 기념일로 처음 지정된 1889년, 날짜는 4월 11이 아닌 4월 13일이었다.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한 4월 13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고 국가보훈처는 밝혔다. 그러나 실제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요인들을 중심으로 날짜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다. 2018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은 임시 헌장 발표와 국무원 선임이 이뤄졌던 4월 11일이 수립일로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임시정부가 4월 11일날 기념식을 시행했다는 자료의 공개와 여러 역사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은 대한민국 근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민주화 운동 중 하나이다. 1960년 1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민주당의 장면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초조해진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정선거를 준비한다.
선거가 실시된 3월 15일, 이승만 정부는 준비된 용지를 미리 투표함에 넣고 야당 참관인을 방해 및 탄압하는 등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97%의 득표율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 득표율이 지나치게 너무 높다는 이유로 오히려 수치를 낮춰 발표하게 된다. 3.15선거가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산시(창원시)에서는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시위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여러 사상자가 나오게 된다.
3.15 마산 의거 당시 실종되어 한달 뒤 바다에서 발견된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는 눈에 최류탄이 박혀 있었다. 어린 학생의 처참한 시신을 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게 되었다. 4월 18일, 경찰의 학원 출입 제한과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은 무장된 60여명의 폭력배에 의해 폭행당한다. 자유당 소속 대한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 인해 약 4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이후, 서울대를 중점으로 전국 대학교 학생이 나섰고 비로소 4.19 혁명이 시작되었다. 4월 25일, 대학 교수들마저 대대적인 데모를 통해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큰 위기를 맞는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민의 승리로 끝이 난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즘, 4.19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인지 후대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 4월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달이다.
학생기자 박준용 (상해한국학교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