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1일 볼로냐 그림책 원화 전시회에 다녀왔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에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 두 손이 자유롭도록 배낭을 메고, 발이 편한 운동화를 신고, 당 떨어질 때를 대비한 간식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1964년부터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린이책 박람회다. 출품작 중 작품성이 우수한 책에 주어지는 볼로냐 라가치상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어 신예작가의 등용문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수지, 백희나, 작년에 라가치상 대상을 받은 이지은 등 많은 작가들이 한국 그림책의 수준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과연 전시된 그림책 원화들은 독창적이고 다채로웠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친숙한 그림도 있었고, 현대 미술 작품이라 해도 손색없는 그림들도 많았다. 일러스트가 글을 보조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았다. 꽤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한국이 콘텐츠 강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낯익은 한 그림 앞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리는 큰데 짧고 빈약한 다리의 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육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학원 간판들이 빼곡히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자기 몸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가파른 계단 앞에 서서 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나라 중소도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이 앞을 서성거렸다.
집에 돌아오니 랑랑이가 반긴다. 그는 버려질 뻔했다가 내 곁에 와서 열두 해 째 같이 살고 있는 수코양이다. 용케 집사 발걸음 소리를 구별하고 미리 현관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머리부터 바닥에 대고 발라당 드러누워 환영 인사를 해주던 아이인데,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지만 아직은 기운이 없는지 꿈뻑 눈 키스로 인사를 대신한다. 당뇨가 심하고 계속 안 먹으니 빈혈도 심해서 의사의 권고대로 위장에 관을 삽입해서 주사기로 유동식을 투여한지 열흘이 넘었다. 일정량을 시간에 맞춰 투입할 수 있으니 안 먹는다고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되었다. 약을 먹일 때도 씨름할 필요 없이 위장으로 바로 넣을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물들은 죽을 때가 되면 안 먹는다던데 사람의 욕심 때문에 애를 계속 괴롭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랑랑이가 모처럼 똥을 푸지게 싸 놓았다. 똥 보고 좋아해 보기는 우리
아이 아기 때 이후 몇 년 만인가 싶다. 그러더니 신통하게도 제 입으로 물을 마시고 사료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바시락바시락 까드득까드득 사료를 씹어 먹는 소리가 노래 소리 보다도 듣기 좋았다. 랑랑이는 다시 책상에 뛰어오르고, 수업을 참견하고, 내 책을 깔고 앉아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보름 만에 위장에 꽂았던 관을 제거했다. 나는 그제서야 랑랑이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
만약 랑랑이가 스스로 먹을 의지가 생기지 않아 위장에 음식을 계속 투입해야 한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편히 보내주기 위해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씹는 번거로움 없이 직접 위장에 음식물을 투입할 수 있어도 계속 그렇게 연명하는 것은 신체 기관의 정상적인 기능뿐 아니라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못할 짓임에 틀림없다.
만약 뇌에 관을 꽂아 시간 맞춰 소화되기 좋게 잘게 부수어 놓은 지식을 투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수학, 영어, 과학, 역사, 교양과 상식에 필수적인 도서 내용까지 읽고 이해하는 과정 없이 뇌에 바로 저장이 된다면, 대상을 이해하고 사고하는 능력 또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더이상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때로 건강상의 이유로 위장에 음식물을 투여하듯 학원에 가는 게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필수영양소를 갖추고 때맞춰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다해도 위장삽관을 통한 음식물 투여가 디폴트값(상수)이 될 수는 없다. 매일 학원 순례로 빼곡히 채워져 혼자 공부할 시간이 없거나 혼자 공부하기 힘들어 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면, 아이의 자활과 행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키워줘야 할지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변화무쌍한 야생의 생태계에서 스스로 사냥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건영(thinkingnfuture@gmail.com)
맞춤형 성장 교육 <생각과 미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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