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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 문학동네 | 2020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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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집중하면, 그 상황이 고난이나 불행, 혼란에 가까울수록 주변 사람, 심지어는 가족의 불행과 고통 행복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질풍노도의 십 대이거나 삶이 고단한 사십 대이거나 다 비슷하다. 하지만 늦게라도 다른 이의 상황을 알게 되고 공감했다면 바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이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름의 빌라>에서 ‘나’는 ‘당신’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했던 여름의 빌라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자기 삶이, 그 시절이 목이 늘어진 티셔츠처럼 나를 휘감아 너무 고달프고 불투명한 미래에 짓눌려서 ‘당신’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은 것 같았으나 자꾸만 자신의 불행으로 향하는 생각 때문에 미처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여름의 빌라에서 돌아온 한 참 후에 ‘당신’에게서 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그때도 ‘나’의 상황은 별다를 게 없었지만 소중한 인연인 ‘당신’의 고통을 알게 되고 공감하면서 드디어 미루고 미뤄두었던 편지를 ‘당신’에게 보낸다.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기대해도 좋을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아프고 슬픈 기억들이 아니라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언젠가 어렸을 때 집에 찾아온 고모가 부모님 몰래 용돈을 주고 가신 적이 있다. 곧바로 동네 가게로 달려가 그동안 먹고 싶지만 참아왔던 색색의 사탕과 불량 과자를 사 먹는데 돈을 몽땅 다 써버렸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아시고는 그 돈을 사용한 내용을 빠짐없이 다 써 오라고 하셨다. 기억에 기대어 쓰기 시작하긴 했는데 도무지 끝자리 얼마는 채울 수가 없었고 그래서 또 혼쭐이 났다. 그때 나는 ‘분명히 고모가 나에게 주신 것인데 이것은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혼난 것보다는 그것이 더 억울했다. 내 맘대로 쓰지 못하는 내 것이라니! 자라면서 내 것인 인생도 다 내 맘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되고 현실과 타협하며 그래도 지금이 최선이라 다독거리며 살아간다. 작가는 말한다. 그렇게 살면서 내가 내어주는 게 무언지 모른다고…
<흑설탕 캔디>의 난설은 ‘나’의 할머니이다. 난설은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고집을 부려 대학에도 갔지만 한 학년도 다니지 못하고(그 시절 여자 대학생은 결혼하거나 임신하면 퇴학이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나이 들어 혼자의 자유를 얻은 얼마 후엔 엄마 잃는 손주들을 키우며 노년을 맞이한다. 주재원인 아들과 손주들을 따라 낯선 나라에 살게 된 난설은, 어린 시절에 손에 흑설탕 캔디를 쥐여 준 누군가를 파리의 어느 아파트에서 부뤼니에씨가 건네준 각설탕을 맛보다가 떠올린다. 그때의 황홀한 단맛의 기억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런 추억에 대해 브뤼니에씨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함에 가슴 아파한다. 그는 한국어를 모르고 난설은 프랑스어를 잘 못한다. 그저 피아노와 음악과 차를 함께하며 그 나이에도 마음은 늙지 않아서 행복하고 설렌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고 피아노 때문에, 브뤼니에 씨 덕분에, 각설탕의 단맛 때문에,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자꾸 떠올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4년 후에야 펼쳐보지 않았던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파리에서 맞닥뜨린 십 대의 삶이 버거워 그리고 나중엔 귀찮아서 모른체했던 할머니의 시간들을… 그리고, 꿈에 만난 할머니는 자기 손에 꼭 쥔 달달한 향내 나는 흑설탕 캔디를 손녀에게 주지 않는다.
“이것은 내 것이란다.”
<여름의 빌라>… 우리가 모른 척 아닌 척 괜찮은 척 살다가 어느 날 깨닫게 되는, 나의,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거울 속에서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무분별한 폭력에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도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당신’도 있고 시대가 원하지 않아서 잃게 되는 게 무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시대에 반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살아 본 사람들이 있다. 흘러가는 대로 두었던 삶에서 뛰쳐나와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들과, 분명 더 용감하게 살아갈 그들을 닮은 미래의 모습들이 있다. 누구도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고 <폭설>에서 빠져나오는 것인 행운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한주란(라니바람, raniwish)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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